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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 본 북·미관계 전망

"북미관계 개선, 상호존중이 열쇠"

“북한 주민을 가득 태운 고려민항이 평양의 주체탑을 들이받아 주체탑이 갑자기 사라지는 상황을 상정해 보시오. 지금 미국은 세계무역센터를 없앤 테러리스트, 테러를 지원하는 나라들과 전쟁을 하고 있단 말이오”.

6~9일 평양을 방문했던 도널드 P.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코리아 소사이어티 회장)는 조선인민군 이찬복 상장(우리의 중장 계급ㆍ판문점 북측대표부 대표)에게 이렇게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대테러 의지를 설명했다.

그레그 전 대사는 12일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통일 특보, 윌리엄 J. 페리 전 미 국방장관 등이 참석한 제주평화포럼에서 “그러나 이찬복 상장 등 북한 당국자들에게 현 국제정세를 이해시키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사실상의 부시 대통령 특사 역할

이찬복 상장은 예상대로 그레그 전 대사의 으름장에 발끈했다. 그는 “우리는 테러를 하지도 않았는데, 미국이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대북 압살정책을 펼치고 있다”면서 “조선인민군은 강하고, 죽을 각오로 미국과 싸울 준비가 돼 있다”고 쏘아붙였다.

이 상장은 “미국이 우리 지도자(김정일 국방위원장)를 비방하고 체제를 인정하지 않는 한 대화는 없다”고 단언했다고 그레그 전 대사는 전했다.

그레그 전 대사도 북한이 이번 테러와 무관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는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북한은 현재 중동 등에서 일어나고 있는 테러와는 직접적 관계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레그 전 대사는 “이번 방북은 미국시민 자격으로 바로 본 미국 행정부의 생각을 전해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으나, 그가 99년 미사일 위기를 해결한 페리 전 장관처럼 사실상 미 대통령의 특사 역할을 수행했다는 관측이 많다.

사실 그레그 전 대사는 1982~88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인 조지 부시 당시 부통령의 안보보좌관을 역임하는 등 미 공화당과 ‘막역한’ 인연을 갖고 있다.

여기에 중앙정보국(CIA)에서 23년간 극동 문제를 담당한 뒤 1972~82년에 미 국가안보위원회(NSC) 아시아 데스크로 활약했고, 89~93년 주한 미 대사를 역임한 대북 문제 전문가이다. 부시 대통령도 대북 문제에 관한 한 그레그 전 대사의 조언을 참조한다는 게 정설이다.

북한이 당초 방북 신청을 했던 4명의 전 주한 미 대사 가운데 유독 그레그 만을 수용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레그 전 대사의 방북 행적은 동행한 미 국무부 직원에 의해 워싱턴에 직보됐다.

그레그 전 대사는 이찬복 상장, 김계관 외무성 부상 등에게 특히 부시 대통령이 클린턴 전 대통령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그는 “부시는 전시 대통령이다. 또 과거 아버지 부시를 누르고 대통령이 된 클린턴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

여기에다 소심한 클린턴과는 달리 단호하다. 클린턴이 카터를 닮았다면 부시는 저돌적인 레이건과 같은 성격의 소유자다”라고 북한 당국자들에게 설명했다고 말했다.


북, 제네바 합의에 비판적

그레그 전 대사는 북한이 2003년 한반도 위기의 핵심인 제네바 합의의 이행 문제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찬복 상장은 “미국이 약속한 경수로 건설을 지연하는 바람에 전력 손실이 심각하다”면서 “이럴 줄 알았으면 제네바 합의 없이 흑연감속로 건설을 강행하는 게 나았다”고까지 말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그레그 대사는 “미국 공화당 의원들도 제네바 합의를 해 손해를 봤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맞받아쳤다.

그레그 전 대사는 그러나 이번 북미 위기는 94년 핵 위기 상황과는 크게 다르다면서 “일각에서 우려하는 대규모 충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이 임동원 특사를 통해 남북관계를 복원하고 미국과의 관계개선 의지를 내비친 것은 전적으로 북한 스스로 체제이익을 고려해 판단한 것”이라면서 “이번 방북에서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최우선 목표로 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고 말했다.

그레그 전 대사는 다만 “(북한의 태도 변화에 대해) 부시 행정부의 강경파들이 자신들의 대북 강경책이 유효하다고 믿을 가능성이 있다”고 경계했다. 그는 “부시의 대북 강경책에 밀려 북한이 대화에 응했다고 봐서는 곤란하다”면서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협상이 어려울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레그 전 대사는 “잭 프리처드 대북 교섭대사 등은 북한과 협상할 때 반드시 한국과 사전 협의를 할 것”이라면서 “북한이 북미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것은 없었다”고 전했다. 그는 “북한은 북한 체제를 비방하는 미국의 수사학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면서 “이 문제가 개선돼 상호존중의 원칙이 어느 정도 지켜지면 북미협상도 재개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북 전략지원, 미국 반대안해

그레그 전대사는 특히 김계관 부상이 제네바 합의의 이행을 위해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와의 대화에 대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재개할 뜻을 피력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남한의 대북 전력지원 문제에 대해 “송배선 등 기술적 난관이 있지만, 남한 당국이 국가 이익상 유익하다고 판단한다면 미국이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한과의 인연이 어느덧 30년에 달한 그레그 전 대사는 제주도의 아름다움에 반했다면서 “나의 방북이 프리처드 대사의 방북과 북미대화의 재개에 기여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김정일, '갈무리'들으며 '여인천하' 즐겨본다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통일 특보는 12일 제주 평화포럼에서 기자들에게 “북한 김정일 위원장이 지난 4일 만찬 자리에서 남한의 대중문화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TV 드라마 ‘여인천하’(SBS)를 80회 이상 보았는데, 잘 만든 것 같다”고 평가한 뒤 “특히 난정 역을 맡은 배우(강수연)가 특히 인상에 깊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이어 “KBS의 사극 ‘명성왕후’와 ‘용의 눈물’도 시청했다”면서 즉석에서 북한 영화 관계자를 불러 “남쪽처럼 사극을 잘 만들어 보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 위원장은 또 “비디오로 남한 영화도 보았는데 ‘JSA(공동경비구역)’는 남북현실을 잘 짚었더라”고 평가했다. 김 위원장은 우리 가요 가운데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 나훈아의 ‘갈무리’, 혜은이의 ‘감수광’등을 좋은 노래로 꼽은 것으로 전해졌다. 김 위원장은 특히 “TV를 보니 남한 스포츠가 많이 발전한 것 같다”면서 “88올림픽이 기폭제가 된 것 아니냐”고 임 특사에게 묻기도 했다.

한편 김 위원장은 지난 10일 공연차 평양을 방문한 가수 김연자씨에게 “내 혈액형은 A형”이라고 말했다고 일본 아사히 신문이 12일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백화원 초대소에서 김씨와 만찬을 하던 중 김씨가 혈액형을 묻자 기밀사항이라는 다른 참석자의 제지를 물리치고 이같이 답한 뒤 “그런 질문은 처음 들어본다”고 말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이동준 정치부 기자 djlee@hk.co.kr

입력시간 2002/04/17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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