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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巨匠] 지휘자 금난새

국내 최초의 벤처오케스트라 지휘자 겸 CEO

지휘자 금난새(55)의 고향은 무대다. 객석에 관객이 없어도 그는 리허설 때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에게 관객이 없다고 무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콘서트 현장을 찾는 음악 팬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무대를 보게 된다. 지휘자건 연주자건 무대란 그들의 최종 리허설 룸이다.

4월 10일 오후 7시 30분 ‘금난새와 함께 하는 오페라 카르멘 하일라이트’ 무대는 삼성전자㈜가 고객 사은 선물로 마련한 자리였다. 이 무대는 금난새가 삼성전자에 받았던 혜택을 되돌려 주는 독특한 보상의 현장이었다.

삼성전자가 2000년 가을부터 3년간(1년에 2억씩) 그의 오케스트라인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원해 주고 있는 데 대한 음악적 보상중의 하나다.

‘희망의 나라’ 합창이 무대와 객석 가릴 것 없이 펼쳐지며 1시간 30분의 잔치는 끝났다. 이날 무대는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3,822석 중 3,230석이 차는 등 성황을 이뤘다. 골수 음악 팬 또는 아름아름으로 오는 관객들이 위주인 여타 오케스트라 무대에서는 보기 힘든 풍성한 풍경이다.

1월 22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신년음악회’가 보여줬던 뜨거운 호응이 결코 1회용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자리였다.


클래식 대중화 위해 뛴 음악인생

우리 시대에는 기계적 복제 문명이 인간의 몸짓을 능멸한다. 눈만 뜨면 가상 현실 이야기다. 그러나 금난새는 이 시대 현장 무대만이 줄 수 있는 단 1회만의 감동은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 주고자 한다. 그가 1997년 창단한 유라시안 필이 순조롭게 작동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아이디어, 기획력, 추진력 덕택이다.

“음악도 상품이다. 기업체에 손 내미지 말고 당당히 우리의 상품성을 주장하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벌지 않는 예술은 위선이거나 독선이다.” 고교시절 레너드 번스타인이 이끈 ‘청소년을 위한 콘서트’에 반한 이래 그는 줄곧 ‘클래식의 브나로드(대중속으로)’를 외쳐왔고 실행해 보였다.

1월 6회, 2월 5회, 3월 6회 연주로 1주일에 1~2차례 콘서트를 가졌던 유라시안 필은 올해 모두 70여 차례의 콘서트를 가질 계획이다. 2000년 50회, 2001년 60회 등 점점 증가하는 연주 횟수가 호응도를 여실히 입증한다.

대표적 오케스트라인 KBS 관현악단이나 서울시립교향악단의 경우, 한껏 잡아야 1년에 40~50회 연주회를 치르는 현실에서 유러시안필의 행진은 상대적으로 돋보일 수 밖에 없다. 고급 예술에 대한 사회적 수요이자 그에 대한 예술적 응답이다. 외국 오케스트라는 1년에 평균 200회 연주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우리 오케스트라는 월급제가 아니예요. 콘서트가 많아야 수입ㆍ수당이 많죠. 그러나 기존 오케스트라는 연주의 성과나 관객의 호응도와는 상관 없이 월급이 나오죠. 예산이 있으니까요.” 엷은 웃음기를 머금고 있지만 금난새의 어조는 단호하다. “훌륭한 연주를 못 하면 수입도 줄어 든다. 이게 바로 우리의 모토입니다.” 국내 최초의 벤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이자 CEO 금난새.

유라시안 필은 잠시도 멈출 수 없다. 모든 단원들은 음악적 성취도에 따라 4개 등급으로 나뉘어 연주나 연습을 한다.

포스코 음악회, 도서관 음악회, 청소년 음악회 등 대형 무대에 서는 60~80인 편성의 오케스트라와 가족음악회, 기업방문음악회 등 중형 무대를 위한 실내악합주단(25~30인조, 12~15인조), 국립중앙도서관, 갤러리 등 작은 무대에 서는 실내악단(현악4중주, 첼로6중주, 목관5 중주, 금관5중주 등) 등 네 차원의 무대는 단원들에게는 건전한 자극제가 된다.


아버지 금수현씨 예술적 서비스 정신 남겨

그의 유라시안 필은 흔해빠진 시ㆍ도ㆍ국가의 지원을 하나도 받지 않았다. “금난새라는 이름 하나를 밑천으로 시작한 거니 이게 곧 벤처 아니겠어요?” 2001년 1월부터 써 오고 있는 국립중앙도서관 별관의 경우도 사용료 대신 연주회 개최로 ‘임대료’를 갈음해 오고 있다.

“해설이 있는 음악회, 제야 음악회를 먼저 꼽을 수 있겠죠.” 그가 신기록 목록을 들춰 낸다. 이전에는 시도해 보지 않았던 각종 형식과 내용의 콘서트가 금난새란 석자에 딸려 나왔다.

특히 1992년부터 시작한 ‘마라톤 콘서트’는 그가 단편적 기획에 의한 인기보다는 원칙을 세워 밀고 나가는 ‘음악적 근본주의자’라는 사실을 일깨웠던 의미심장한 이벤트였다.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교향곡을 매년마다 서울과 의정부 등 근교 도시에서 닷새 꼬박 완주, 커다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협주곡의 경우는 10개의 곡을 장장 7시간 반 동안 한 곳에서 완주하는 뚝심으로 청중을 사로 잡았다.

“언제나 새로움을 추구하라는 아버님이 제 영감의 원천이죠.” 아버지 금수현씨가 지상에 놓고 간 선물은 가곡 ‘그네’뿐만은 아니었다. 예술가는 새로움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은 아들에겐 이렇듯 대원칙으로 남아 있다.

아들에게 그것은 ‘청중을 위한다는 것, 예술적 서비스 정신’으로 번역됐다. 최초로 호적 등재된 한글 이름이란 기록 조차 이후의 의미 있는 최초들에 가려 희미하다. 1977년 한국인 최초로 카라얀 콩쿨 입상을 시작으로 1990년 모스크바 필, 1991년 상트페테스부르크 필 지휘 역시 한국인 최초의 기록이다.


음악 이외의 협의 의해 흔들리던 시간

음악계에서 그의 스타덤은 확고하다. 그의 콘서트라면 사람들은 공연이 끝나도 가지 않는다. 객석을 향해 던지는 수줍은 듯 재치 있는 멘트의 주인공은 공연 후에도 갈 수 없다.

그의 사인을 받으러 팸플릿을 들고 끝없이 이어진 행렬은 분명 여타 클래식 공연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그는 몰려드는 관객들에게 자신의 사인을 일필휘지해 준다. 그렇다면 그는 대중의 갈채를 탐하는가. 그러나 그것은 금난새 특유의 성실성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는 카리스마 없는 스타다. 수원 시립교향악단이나 KBS 교향악단에서도 그랬듯이 단원들의 어려운 사정에 귀 기울이려 애썼다. 내면이 섬세한 뮤지션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하려 애쓰는 그의 모습은 음악계의 신선한 화제였다.

지휘자는 폭군이라는 통념을 일거에 날렸다. 최연소의 나이인 33세로 KBS 교향악단 상임을 맡은 그는 높은 분이나 PD 등 외부의 간섭에 취약한 한국 예술계의 실태를 알게 됐고, 1992~97년은 고사 직전의 수원 시향의 지휘봉을 쥐고는 1급의 교향악단으로 담금질해 냈다.

“정치와 결탁한 방송 매체의 힘, 5공 당시의 정치적 행사 등 음악외적 문제로 혹독한 어려움을 겪었던 KBS 시절은 나를 죽였다. 진짜 나의 아이디어가 발현된 것은 가난한 수원 시향 이후였다.” 그와 유라시안 필의 현재는 1977년 카라얀 콩쿨 입상자가 이후 국내 음악계 일선에서 음악적으로, 인간적으로 겪어 온 시간들의 총합이다.

4월 9일 국립중앙도서관 별관 유라시안 오케스트라 전용 연습실. 각 현악 파트의 수석 주자로만 이뤄진 ‘유라시안 콰르텟’이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를 연습하고 있었다. 대편성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알고 있기 쉬운 금난새의 딴 면모를 본다.

그는 4중주단 앞에서 지휘하고 있었다. 리더인 여은정은 “기획사의 대행 없이도 오케스트라의 전폭적 지원 아래 형식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연주할 수 있다”며 “콰텟에 흔히 있는 멤버간의 인간적ㆍ음악적 불화는 금 선생 아래서는 생각도 못 할 일”이라고 말했다.

2000년 그는 자신의 유라시안 필 단원 20여명과 함께 평양을 갔다. 북조선 교향악단 단원 70여명과 만수대 극장에서의 역사적 첫 협연을 논의했다.

당시 나흘 동안 그들은 글링카의 ‘루드밀란 서곡’,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앙콜곡으로 ‘아리랑’까지 연습해 두고 있었으나 어이 없게도 금광산 관광 자금 문제가 불거져 남북 사이가 냉각되는 바람에 허무하게도 무산되고 말았다.


최초 꼬리표 단 예술가 운명

“내 팔자가 최초의 것을 하라는 팔자인가 봐요. 항상 뭔가 다른 걸 추구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노라면 영락 없이 그 꼴이죠.” 가까이는 울릉도 역사 이래 벌어질 최초의 오케스트라 연주가 그렇다. 물론 나흘 동안 북한서 가졌던 가슴벅찬 연습 역시 ‘최초 무대’라는 휘장을 달고 싶다.

“휴식 시간이면 쏜살같이 그들끼리 사라지는 작태가 처음에는 당황 스러웠지만 두 번째 연습 때는 모두 티 파티에 함께 오더군요.” 가슴 아팠던 것은 지극히 순박하고 연주자로서도 유능했던 그들이 한결같이 감내하고 있던 궁핍이다. 특히 관악기는 너무 열악해 저기서 어떻게 소리가 나오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한국 최초로 오케스트라 내에서 생긴 콰텟은 물론 오케스트라로 수립한 각종 한국 최초의 기록들을 또 다른 최초가 이을 것이다. 그는 오늘도 국립중앙도서관 연수동내 유라시안 필 사무실에는 연주요청, 스케줄 문의 등 전화가 끊이지 않고 있다.

“처음부터 다시 해볼까.” 그 같은 요구에 아무 말 않고 따르는 단원들의 말없는 호응 덕에 그는 외롭지 않다. “가장 애착이 가는 최초라…, 그런 건 없네요. 새로운 것을 자꾸 만들어 가야 하는 게 예술가의 운명이니까요.”

그의 최초 기록들은 그처럼 시지프스의 노력이 축적된 결과물의 동의어일 지 모 른다. 금난새가 명함에 ‘유라시안 필 음악감독(musical director)’이란 말과 함께 CEO(최고경영자)라는 직함을 함께 명시해 두는 것은 자기 위치를 알고 당당히 밝히는 정당한 몸짓이다.

그는 올해 삼성(2억원) CJ 39쇼핑(5억원) KT(2억원) 등으로부터 현금 9억을 지원금으로 확보해 두었다. 그는 그보다 공연 후 객석에 돌린 설문 조사 결과가 더 궁금하다. 후원자가 되고 싶다는 의견이 이번엔 또 얼마나 들어 올 지 궁금해 진다.

그는 자신의 음악을 다시 듣고 싶다는 말이 가장 반갑다고 한다. 무대에 되도록 많이 서고 싶다는 연주자로서의 본능이다.

장병욱 주간한국부 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2002/04/17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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