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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귀금속공예 명장 변태형

[인간탐구] 귀금속공예 명장 변태형

"한국의 까르띠에, 꿈이 아니죠"

"콤플렉스는 감추면 감출수록 더 커집니다. 저는 제 환경에 대해 한번도 부끄러워 해 본적이 없습니다. 부끄러워했으면 오늘은 없었을 것입니다. "

당당한 사람 변태형(47). 초등학교 출신으로 대학교수에 임용된 주인공이다. 학력은 빈약하지만 귀금속공예 분야에선 국내 최고로 공인받은지 오래다. 자칭 '반지 만드는 사람', 30여년 한 길을 걸어온 명장이다. 올 봄부터는 홍익대 금속디자인과 겸임교수라는 이름이 추가됐다.

두번째로 그를 만난 날 조용하던 사무실이 젊은 손님들로 활기에 넘쳤다. 학생들의 소원대로 이날 수업은 대학 강의실이 아닌 그의 작업장에서 이뤄졌다.

그의 전공인 귀금속 공예는 특히 부단한 연습과 치밀함을 필요로하는 간단치않은 분야다.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파에다 수십년의 관록이 붙은 그도 자신의 솜씨가 항상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고 했다.

"이 귀금속 세공은 특히 수학적인 사고력이 있어야 잘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공정이 초정밀로 이뤄지는데다, 그것도 모두 수작업이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만 해도 단 0.01mm만 오차가 나도 반지에 물릴 때 그대로 깨져버립니다.

더구나 제작에 쓰이는 갖가지 미세 부품들이며 용접, 연마, 망치질 등 아주 다양한 작업들이 총망라돼있습니다. 그걸 모두 혼자서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디자인까지 들어가면 더 복잡해집니다. "


귀머거리3년 벙어리 3년 지낸뒤 기초 익혀

스탠드 불빛을 의지삼아 하루종일 손끝만 응시한 채 일하기를 수십년. 스트레스에 대한 대안이 없으면 버티기 힘든 작업이다. 시력도 떨어지고, 술도 다음날 작업에 영향을 미칠까 봐 마음대로 마시지 못한다.

징크스도 있다. 아침에 보석을 물리면 판판이 깨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몸의 긴장이 풀리지 않은 시간이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사람을 가르치는 강의가 그에겐 작업보다 수월하다. 초보자들의 솜씨를 지켜보노라면 '차라리 내 손으로 하나 더 만드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시달리는 직업병만 없다면 말이다.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참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제가 이 일을 시작한 1970년대의 10년은 요즘의 20년과 맞먹는 것 같습니다. 그땐 정말 밤도 없이 일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서 가장 염려스런 것도 그런 부분입니다.

한번에 두가지 일을 시키거나 조금만 야근할 일이 있어도 못하겠다고 나갑니다. 어떻게 하면 기술을 빨리 배울 수 있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늘 대답해주는 말이 있습니다.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말고 오로지 원하는 일에 온 정신을 쏟아야 제대로 기초가 쌓입니다. "

30여년전 그는 초등학생이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형이 개인과외를 받을 수 있을 만큼 풍요롭던 가정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변씨가 초등학교 2학년에 오를 무렵 아버지가 집 계약 사기를 당하면서 풍파가 닥쳤다. 자포자기한 부친은 술과 방황 속에서 오랫동안 헤어나지 못했다. 위태롭게 이어지던 살림은 그가 4학년이 될 무렵 최악의 고비에 다다르고 있었다.

"미술시간 숙제로 도화지에 검은 크레용을 칠해가야 했는데 크레용을 사주시지 못하는 어머니 때문에 돈 문제로 크게 떼쓰고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나중에 미술대회에서 제 그림이 1등상을 받게 됐다며 심사를 맡았던 장학관이 저더러 그림을 설명해보라고 했는데, 제 어린 마음에도 그런저런 설움이 북받쳐 설명 대신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가난은 온 가족을 힘들게 했다. 유일하게 보낸 초등학교 학업도 그나마 순탄하지 못했다. 인천이 고향인 그는 서울과 부산, 당진 등을 분주히 옮겨가며 살았다. 부산에선 형과 함께 아이스크림, 군고구마 장사를 하며 쌀과 보리쌀을 해결하기도 했다. 김치조차 없어 생강을 반찬삼아 몇달간 밥을 먹은 적도 있다.

"한번은 어느 학교 앞을 지나다 여학생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는걸 봤습니다. 원래 그런 짓은 한번도 해 본적이 없는데, 그때 처음으로 노는 아이들의 고무줄을 끊고 달아나버렸습니다. 나는 이렇게 고생하는데 너희들은 참 희희낙락이구나, 왠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환경이란 게 사람을 그렇게 바꿔놓더군요."

늘 1,2등을 다투던 우등생이었지만 기성회비는 한번도 낼 수가 없었다. 힘겨운 가난은 소년의 성격까지 바꿔놓았다. 예전의 밝고 쾌활한 모습은 사라지고 점점 말이 줄어든 채 틈만 나면 책만 붙들고 있었다. 갑자기 추락한 소년에게 책은 가장 큰 위로였다. 밥상에서도 책을 놓지 못했고 밤이면 이불을 덮어쓴 채 손전등을 비추며 책을 읽었다. 웬만한 필독도서를 그때 다 독파했다. '마지막 잎새'가 던져준 희망의 메시지는 바로 자신이 찾던 동아줄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뒤 금은세공집서 잔심부름

1969년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무렵 형이 일한다는 서울 명동의 한 공장에 따라갔다가 함께 취직을 결심했다. 그도 가족을 도와야 할 상황이었고, 공장에서 본 조그맣고 신기한 연장들이 마음을 끌었다. 바로 현재의 금은세공 일이었다.

잔심부름 같은 허드렛일들이 맡겨졌다. 같은 처지의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도 많았다. 조금만 청소에 빈틈이 보이거나 거슬리는 일만 있어도 세공기술자들로부터 주먹이 날아왔다. 워낙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정밀 작업이다 보니 작업자들의 신경이 예민할대로 예민한 탓이 컸다.

그 중 한 사람은 업계에서도 알아주는 일류 기술자였다. 그만큼 요구도 유난히 가탈스러웠다. 전체 공정 중 마지막 광을 내는 일은 주로 어린 보조자들의 몫이었는데, 그 기술자는 툭하면 퇴짜를 놓으며 반지를 내던지는 통에 악명이 높았다.

그런 '시집살이'가 오히려 그를 단련시켰다. 어떻게 해서든 기술자의 까다로운 주문을 만족시키려 나름대로 열심히 궁리를 짜냈다. 속속들이 광을 내기위해 솔 대신 대나무 젓가락을 깎아 써보기도 하는 등 도구와 방법을 다양하게 바꿔가며 길을 찾았다.

흡족할만큼 말끔히 광을 내 오는 변씨를 기술자가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부턴 광내는 일에서 나아가 간단한 제작공정까지 맡기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여전히 광내기 작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왜 너만 다른 일을 하냐'고 눈총을 주기도 했다.

어느날 밤 여느 때처럼 밤늦게까지 남아 연습을 하던 중 우연히 업체 사장의 형님이 공장에 들렀다. 그리고는 그가 일하는 양을 한참동안 말없이 지켜보다가 돌아갔다. 다음날 갑자기 그를 부른 사장이 '직접 해 볼 수 있겠냐'며 하트 모양의 자수정 반지 하나를 만들어오라고 했다.

보조가 아니라 기술자로 승격시키는 첫 시험이자 숙제였다. 사흘만에 작품을 완성해 사장에게 가져갔을 때 그는 곧바로 칭찬을 받았다. 그 날부터 본격적인 기술자가 되었다. 일을 시작한지 겨우 1년 중학생이 됐어야 할 나이였다. 얼마 뒤 우연히 심부름을 간 길에 자신의 첫 작품이 매장 진열대에 놓인 것을 보았을 땐 상을 탄 것보다 더 기뻤다.

스물한살이 되던 해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안았다. 그러나 정작 가장 큰 혼란과 고통은 그같은 세상의 인정을 받은 이후에 일어났다. 그 무렵 그는 독립해 직접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들어오는 주문들마다 하나같이 수익성과는 거리가 먼, 만들기 어렵고 복잡한 것들뿐이었다.

의뢰하는 쪽이야 나름의 기대 때문이었겠지만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그로선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외에도 경영 현장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회의를 몰고 왔다. 잘 나가던 그가 어려움에 빠지자 주위의 사람들도 안면을 바꿨다.

얼마전까지도 그토록 자신을 부러워했던 친구들마저 공공연히 무시하며 등을 돌렸다. 어느날 수면제 수십알을 삼키고 자살을 기도했다. 눈을 떠보니 이틀뒤 병원 침상위였다.

"그때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우선은 죽는다는 게 별 것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오기가 새로 솟아났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엔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후엔 저를 이용하거나, 줘야 할 돈을 떼먹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더 이상은 가만히 당하지만 않았습니다.

또 한가지 배운 것은 그렇게 자살소동까지 벌였는데도 몇 달후에 보니 그나마 있던 공장과 곗돈까지 다 날아가고 빚만 돌아오더라구요. 결국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지 다른 누구도 대신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걸 철저하게 배웠습니다."

다시 일어섰다. 1989년엔 노동부가 인정하는 대한민국 귀금속공예 명장으로도 선정돼 명실공히 국내 최고의 기술자로 이름을 새겼다. 아쉬운 것은 가난 때문에 다 하지 못한 학교교육.

사실상 공장생활 때에도 학원을 다니며 공부와 일을 함께 하려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가뜩이나 잦은 야근으로 몸이 무리한 터에 결국 위장병과 현기증만 얻은 채 포기하고 말았다. 한참이나 지난 1994년 동국대 산업기술환경대학원을 수료하는 것으로 그나마 아쉬움을 달랬다.


내 이름 건 이론적 체계 세우고 싶어

학력차에서 생길 수 있는 상식의 핸디캡도 나름의 방법으로 해결했다. 한문은 책을 사서 공부했고 간단한 정도의 영어도 직접 독학했다.

그간 자신의 일과 관련해 영어로 된 원서도 적잖이 보았지만 정 어려운 부분은 주변의 도움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학력에 대한 일반의 편견이나 선입견과는 달리 그가 어딘가 여유롭고 똑똑해보인다면 그 비결중 하나는 '사소한 것에 자존심을 걸지 않는다'는 것이다.

"낯선 용어가 들릴 때도 주저없이 물어봅니다. '인프라'라는 말이 처음 나왔을 때도 뭔 뜻이냐고 주위에 물어봤더니 저 말고도 모르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모르는 걸 아는 척 하는 게 힘든거지, 몰라서 물어보는건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옛날에도 대학 다니는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들로부터 많이 배우려고 애썼습니다. 그런 점 때문에 그 친구들이 저를 좋아하고 높이 사 주기도 합니다."

기술자이자 작가, 교수인 그는 주얼마이스터라는 개인업체를 가진 경영자이기도 하다. 그 어떤 입장에서든 안타깝게도 그가 마주하는 국내 귀금속산업의 현실은 그리 즐겁지만 않다.

어렵사리 디자인을 개발해봐야 저작권도 작가도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 심하게는 단 보름이면 복제품이 귀신같이 뿌려진다. 제도가 장인들을 지켜주지 못한다. 한국에 까르띠에와 같은 명품이 나오지 않는 것은 인재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만큼 척박하기에 그가 더 앞당겨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이후 전원 만장일치로 그의 임용을 결정했다는, 작년말 홍익대 관계자들과의 면담 때에도 털어놓았던 바로 그 얘기다.

"막연한 표현으로 전수돼 오던 우리 귀금속세공기술을 정확한 수치 등으로 통일한 이론적 체계를 세우고 싶습니다. 성공하기만 한다면 여러모로 큰 기여를 하게 될 겁니다. 저도 변태형 이론이란 이름 하나는 남기고 갈 수 있겠지요? (웃음) "

글·사진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10@chollia.net

입력시간 2002/04/1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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