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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농사짓는 판화가 이철수

[인간탐구] 농사짓는 판화가 이철수

눈만 돌리면 지천에 깔린 그림거리

박달재 너머엔 박달보다 튼튼한 남자가 산다. 가족을 이끌고 재를 넘더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농부가 되었다가, 판화가가 되었다가, 그렇게 그 땅에 뿌리를 내렸다. 이따금 반가운 엽신처럼 그림만 날라온다. 자신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벚꽃처럼 사람들 속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그림들이다.

“벌써 16년이나 지나고 보니 제가 어땠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합니다. 여기서 나갈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산골로 간 판화가 이철수(48). 토박이 동네 어르신들보다 못하지만 얼추 농사꾼 티가 묻었다. 가꾸는 논밭만 약 3,000평. 자신의 밥이며 반찬들이 대부분 그곳에서 나왔다.

쌀과 보리, 채소 등은 물론 여름이면 수박과 참외도 직접 길러 먹는다. 봄이 깊은 요즘은 마음이 더 분주하다. 볍씨 촉도 틔워야 하고, 못자리 판 준비하랴 논에 퇴비를 넣는 일까지 이번 주안에 마쳐야 한다.

그렇게 봄부터 가을까지 땅 농사를,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판화 농사를 짓는다. 바쁘기는 서울 시민 만큼 바쁘지만 오히려 몸과 마음이 살찌는 일 중독이다.


농사는 좋은 공부, 이젠 의무감 생겨

“농사와 판화작업을 둘 다 하려니 할 일이 더 많습니다. 특히 농사일이 시작되면 상대적으로 판화작업 시간이 줄어들 수 밖에 없어 평소에라도 가능한 한 작업을 많이 해야 합니다.

일단 농사일을 하고 오면 미진하게라도 손이 떨려 조각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주로 아침에 작업을 하고 오후에 농사를 나갑니다. 농사는 참 좋은 공부가 됩니다. 마음도 이완되고, 잡생각도 없애줍니다. 이젠 농사를 좋아한다기 보다 어떤 의무감 같은 것까지 느낍니다.”

산골에서 만들어 낸 그의 그림들. 낯설지가 않다. 워낙 많은 작품들이 세상에 나와있는 이유도 있고, 그림 자체가 주는 편안함도 초면을 초면답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림보다 여백이 더 많은 그의 그림 속엔 특히 짤막하게 덧붙은 글이 거의 화룡점정 수준이다.

부드러운 사각형 안에 달랑 새 하나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 몇 줄의 글.

‘새 한 마리/유리창 안에서 바깥을 찾지 못한 것 같다/너같다’. 찻잔이 그려진 그림 밑엔 이런 글도 달려있다. ‘식은 차를 마시다가/빠져죽은 파리를 꼭꼭 씹다./뱉고 나서 비로소 더럽다/퉤!’ 길러보니 땅콩이 제일 재미있다는 그는 그림 안에도 유난히 땅콩을 총애하는 듯 보인다. 땅콩 몇 개가 달린 줄기 하나와 밑글. ‘땅콩을 거두었다/덜 익은 놈일수록 줄기를 놓지 않는다/덜 된 놈!/덜 떨어진 놈!’

이씨의 어린 시절. 주위에서 그림을 잘 그린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그 소리에 혹해서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화가가 돼 있었다. 그림 대신 글을 택했으면 어땠을까. 그림 못지않게 책 읽기도 좋아했던 그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신춘문예에 응모작을 보낸 한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도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버리지 못했다. 중학교 때 부친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남은 학창시절 내내 등록금에 쫓겼다. 사춘기의 혼란과 가난이 겹치면서 방학이면 반 부랑아처럼 집 밖을 떠돌았다.

돈도 없고 꼭 다녀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해 대학도 가지 않았다. 그림도 독학하다시피 공부했다. 운 좋게도 주위에 도움을 주는 은인들을 많이 만났다. 20대 가난뱅이 무명화가 시절 그의 자취방에 슬며시 돈이 든 봉투를 놓고 가던 이현주 목사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개인전이란 걸 가졌다. 1981년이었다. 그런데 의아하리만큼 뜨거운 반응이 곧바로 터져 나왔다. 이름도 생소한 신인.

그러나 작품들이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전시소식을 알리지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시장의 관람객은 연일 불어났다. 고(故) 문익환 목사, 강원룡 목사 등 재야의 쟁쟁한 거물급 인사들 대부분 그곳에서 만났다.

매일 출근하다시피 이미 본 그림을 또 보러 오는 사람, 마지막 날 여전히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차마 문도 닫지 못한 채 쩔쩔 매다가 다음 전시준비를 위해 기다리고 있던 다른 작가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다.


어느새 민중미술계의 대표작가 반열에

“진짜 촌놈이 처음 개인전을 열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많았습니다. 홍보가 뭔지도 몰라 그냥 전시회만 열면 저절로 사람들이 찾아오는 줄 알고 태연히 전시회를 열었지요. 양성우씨가 ‘보도자료는 다 보냈냐’고 묻길래 그게 뭐냐고 물어봤을 정돕니다.

그래도 그림의 힘만 있으면 굳이 알아달라고 떠들지 않아도 저절로 알려진다는 것을 믿게 된 게, 그때 그 거친 제 그림들이 다 팔려나가는 걸 봤을 때도 그랬고, 요즘도 제가 전시회를 하거나 광고 한번 하는 법 없지만 그림이 저 혼자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철저히 제 역할을 하는 걸 보면서 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의 그림이 좋아 찾아온 한 재야단체 사람들과 만남이 시작되면서 자연스레 그들과의 연대가 맺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그린 걸개 그림이나 소식지, 전단지, 포스터 등이 곳곳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머리에 띠를 두르고 주먹을 치켜 든 채 깃발을 펄럭이는 전형적인 ‘투쟁’의 그림들이다. 2년쯤 지났을 땐 이미 민중미술계의 빼놓을 수 없는 대표작가로 분류되고 있었다.

개인전 때부터 종로경찰서 형사들의 방문을 받았던 그는 펴내는 책마다 곧바로 판금조치를 당했고, 불시에 가택수색을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렇듯 빛나던 최고의 정점에서 갑자기 그가 서울에서 사라져버렸다.

“인간 관계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서로 갈등하고 다투며 사는 모습, 누구랄 것 없이 자기의 이익 앞에선 조금이라도 더 큰 몫을 갖겠다고 남을 짓밟는 모습이 너무 싫었습니다. 차라리 안 보고 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 마음은 같습니다.”

마침 아내가 둘째 아이를 가져 건강이 좋지 않았다. 출산 때까지 요양 겸 시골에 살기로 했다. 아는 분의 도움을 받아 맨 처음 찾은 곳은 경북 의성의 한 농가였다. 전화도 없는 깡촌, 둘 다 서울 태생인 부부로서는 내심 긴장된 선택이었다.

그러나 신통할만큼 부부에겐 농촌이 잘 맞았다. 건강도 좋아졌고, 귀농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그곳에서 배웠다. 사실상 제천에 가기 위한 예행연습처럼 돼버렸다. 약 2년 반의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났을 때 부부는 본격적으로 귀농을 결심했다.


25년전 충북 제천에 새 보금자리

1986년 아는 얼굴 하나 없는 충북 제천에 새 보금자리를 꾸몄다. 앞으로 천둥산이 있고 박달재와 다랫재 사이 사방이 산으로 감싸 안긴, 현재의 집이 있는 곳이다. 470만원짜리 낡은 한옥. 네 살 배기 아들과 갓 첫 돌이 지난 딸이 곁에 있었다.

직접 농사를 지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맨 처음 마당에 얼마간 채소를 심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자신이 붙을 때마다 조금씩 작물의 종류와 양을 늘려갔다. 실패해 본 기억이라곤 별로 없다. 정 많은 이웃들이 이 뜨내기 부부가 실패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문제에 부닥치면 스스로 이웃집에 달려가 물어보기도 했지만, 묻기도 전에 집 앞을 오가며 부부의 서툰 일을 ‘참견’해 주었다. 해가 바뀌면서 점차 텃밭이 넓혀졌고, 4년 전부터 3,000평에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농번기에는 판화도 뒷전으로 밀렸다. 어느 해 장마철 한밤 중 논둑이 터져 밤새 한 숨도 못 잤다. 폭우가 휩쓸고 간 후 땅속에서 썩어버린 감자를 보며 한숨을 내 쉰 적도 있다. 농사든 그림 작업이든 언제나 혼자일 수밖에 없는 일.

그러나 그 고요함이 많은 것을 주었다. 아주 더디지만 깊숙이 그를 바꾸어놓았다.

“조용하고 덤덤하면 오히려 보이는 게 많습니다. 자신의 허물도 보이고, 세상도 더 잘 보입니다. 젊었을 때 저는 꽤 강파르고 모난 성격이었는데 이곳에 들어온 뒤 조금은 너그러워 진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도 조용히 살 기회를 많이 갖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농촌만이 최고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어디나 다 사람 사는 곳이지요. 다만 각자 자리에서 좀 더 통찰력을 갖고 살아갔으면 합니다.”

1989년 무렵 충격을 받는 사건이 있었다. 독일과 스위스의 순회 개인전을 떠난 길에 누군가 그의 그림에서 ‘전체주의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그렇잖아도 자신의 그림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자괴감에 혼란스럽던 중이었다.

그 자리에선 그렇지 않노라 항변했지만, 그날로부터 약 1년 동안 아무 작업도 할 수 없었다. 한참 만에 다시 조각 칼을 잡았을 때 그는 이미 다른 길에 접어들어 있었다. 그림도 대화와 같은 것, 세상을 따뜻하게 바꾸자면 자신의 그림부터 따뜻해지기로 했다.

자연과 일상적인 소재들이 편안하게 그림 속에 녹아 들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쯤 되자 요즘 그에 가까운 그림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림소재가 궁해 본 적은 한번도 없다. 오히려 목판작업이 미처 좇아 오지 못할 만큼 그리고 싶은 것들이 넘치고 넘쳤다.

눈만 돌리면 지천에 그림거리가 널렸다. 어렵게 찾지도 복잡하게 그리지도 않는다. 박달재에 깃든 이후 체중은 10kg나 불었지만, 그가 그리는 그림은 갈수록 단출하게 살이 빠지고 있다. 요즘 깎고 있는 작품만 해도 이미 몇 년 전에 생각해둔 것이다.

그런 것들이 메모장에 수두룩 쌓인 채 제 차례만 기다리고 있다. 아무리 촌음이 아까운 판화라도 해가 지면 미련 없이 일손을 접는다. 농사도 마찬가지다. 산골농부가 되면서 스스로 만든 철칙이다. 쉬어야 할 땐 철저히 쉰다. 지금도 7개 잡지에 연재물을 보내고 환경운동에도 참여하는 그이지만 일에 휘둘리지는 않는다.


인터넷 글도 육필 스캔해서 올려

아이들 통학문제로 4년 전 처음으로 운전을 배웠다. 원래는 못마땅했던 인터넷도 잦은 복사로 잔뜩 뭉개진 자신의 그림을 좋아라고 나눠 갖는 네티즌들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이왕 사람들이 찾는 그림, 차라리 말끔한 원화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산골에서 좀처럼 외출도 않는 그는 인터넷도 괜찮은 미술운동의 연장지이다. 4월 26일이면 홈페이지도 개설한다. www.mokpan.com이다. 한사코 자신은 육필로 쓴 글을 스캔해서 게시판에 올리겠다는, 디지털시대의 아날로그 반군 이씨를 만날 수 있다.

때로는 그에게 ‘선수행을 많이 한 것 같다’거나 ‘혹시 스님출신이 아니냐’고 묻는 이들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그 짐작은 모두 틀렸다. 수행은 커녕, 요즘도 하루에 열 두 번씩 생각이 갈짓자를 그리는 즐거운 범부다.

“어떨 때는 내가 참 많은 것을 얻었구나 싶다가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실제로 그리 얻은 것도 없는데 왜 내가 그런 생각을 하나 이상해집니다. 더 생각해보니 워낙 제가 제 삶에 기대한 것들이 없다 보니 그런 것 같았습니다. 그만큼 예전의 제가 부정적이었죠.

그러다가 ‘에이, 내가 무엇을 얼마나 얻었든 그것도 결국엔 내 것이 아니다’라는 결론에서 생각이 끝납니다. 다들 저더러 변했다고 하는데 어쩌면 조금 변하긴 변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입력시간 2002/04/23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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