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구매열기 확산, 비싼만큼 제값…폼나게 살아요

대학생 박수영(여ㆍ23)씨는 요즘 젊은 여성사이들 사이에 유행한다는 ‘명품계’ 회원이다. 친구 6명과 매월 10~20만원씩 계를 부어 평소 갖고 싶었던 명품을 장만한다. 프라다 가방이나 구찌 선글라스, 샤넬 화장품 등 해외 유명 브랜드 제품이 주요 구매 품목이다.

학생 신분에 수십 만원을 호가하는 명품을 사는 것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한다. 박씨는 “가치 있는 제품에 비싼 비용을 치르는 것은 과소비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박씨가 명품을 구입하는 과정은 상당히 치밀하다. 우선 백화점과 압구정동 등의 명품 샵을 두루 돌아다니며 최신 유행 스타일을 익힌다.

인터넷 명품 동호회 회원들과 정보를 교환하고 명품 관련 잡지를 철저하게 뒤져 감각을 업그레이드하는 것도 필수절차다. 원하는 제품을 선택하면 주요 인터넷 쇼핑몰을 돌아다니며 가격을 철저하게 비교한 뒤 반품, AS 여부까지 확인하고 나서 최종 구매를 결정한다.

‘최고의 제품을 최저 가격으로 장만, 폼 나게 사용한다’는 것이 그의 명품 구입 원칙이다. 박씨 역시 1년 전 친구가 해외여행 기념으로 사다 준 명품 ‘T셔츠’를 입어보기 전에는 친구들이 명품 구입에 왜 열광하는 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좋기야 하겠지만 별 차이가 있겠어’ 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한 번 명품 옷을 입은 후 그는 자신이 명품 골수팬임을 밝히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20~30대가 주요 구매층으로 자리잡아

젊은 층 명품족이 늘고 있다. 경기가 회복되면서 명품 구입 시장도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

명품족 하면 흔히 40~50대 ‘사모님’을 떠올리는 것은 이제는 옛말이다. 20~30대 젊은 층 명품족이 명품 구매의 주요 계층으로 등장하면서 고급 브랜드에 대한 소비가 크게 늘고 있다.

신세계, 현대, 갤러리아 등 국내 주요 백화점에 따르면 해외 수입 명품의 올 상반기 매출액은 전년도 대비 20~50% 가량 늘어난 것으로 파악됐다.

갤러리아 백화점 명품관은 올 상반기 여성 고급 의류를 중심으로 455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2.9% 늘어난 매출이다. 신세계 백화점 명품관은 3월 1~5일 매출을 분석한 결과 전년 동기 대비 50%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갤러리아 백화점 관계자는 “예전에는 해외 고급브랜드를 찾는 주 고객층이 40~50대에 한정돼 있었으나 요즘엔 20~30대 고객이 크게 늘어나면서 매출이 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젊은 층 명품족이 즐겨 찾는 사이버 쇼핑몰과 할인점의 매출 신장세는 더욱 비약적이다. 용돈을 절약하거나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 명품을 구입하는 이들은 시중가에 비해 명품을 20~30%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사이버 쇼핑몰과 할인점을 찾고 있다.

지난 달 중순 ‘명품 인기상품 공동구매’ 전략을 내걸고 명품관을 개편한 인터넷 쇼핑몰 인터파크는 행사 개시 보름 만에 매출 300% 증가를 기록했다. 이 회사 홍보팀 남창임(28)씨는 “젊은 고객층에 인기가 높은 브랜드를 중심으로 신상품을 대량 확보했다”며 “전체 쇼핑몰 매출에서 명품관이 차지하는 비중이 15%에서 40%대로 껑충 뛰어올랐다”고 말했다.

명품 유행이 확산되면서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하는 ‘원정파 고객’도 늘고 있다. 이들은 서울에서 인기를 얻은 후 지방으로 내려가는 유행 시차를 극복하기 위해 먼 길을 찾아오는 수고도 아끼지 않는다. 현대 백화점이 지난해 카드매출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압구정 본점에서 판매된 의류, 잡화 등 50개 고급 브랜드 가운데 18.5%를 지방 고객들이 사간 것으로 나타났다.


합리적 명품주의자들 L세대

고급 소비문화를 주도계층으로 새롭게 등장한 젊은 층 명품족. 이들은 문화 엘리트 의식이 강하고 유행에 민감한 계층인 L세대(Luxury generation)로 불린다.

L세대는 ‘명품을 선호하는 여피족’을 가리키는 말로 미국 뉴욕에서 시작됐다. 우리나라에서는 ‘명품을 선호하는 경제 기반이 약한 젊은 층의 사람들’로 통용되고 있다. 이들은 명품의 소비를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한다.

명품 브랜드의 마케팅 전략 강화와 젊은 층의 외모 지상주의가 맞물려 명품 소비에 극도로 집착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고급스런 차림새가 자신들의 가치를 높여준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일부 부유층의 과소비와 달리 합리적인 구매를 추구한다. 이른바 ‘일품 명품주의’를 내세운다는 것이 L세대의 특징이다.

과거 명품족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명품으로 치장하고 다니며 부를 과시했다면, 이들은 ‘페라가모 구두’ ‘발리 핸드백’ 등 단 한가지 아이템의 명품 소품을 적극 이용한다. 액세서리 명품 매장의 관계자는 “비싼 가격이 부담스러운 젊은 고객들에게 명품을 패션의 ‘포인트’로 사용하라고 권하면 선뜻 구입을 하는 경우가 많다” 고 말했다.


물질화·개인화 세대 반영

젊은 층 명품족의 부각은 ‘물질화’ ‘개인화’된 사회 내면을 반영하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현재 중ㆍ장년이 된 세대가 어린 시절 ‘공기놀이’ ‘딱지치기’ 등을 하며 또래와 어울리는 놀이 문화를 즐긴 반면, 요즘 20대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1980년대에 유년기를 보내면서 쇼핑으로 물건 구매하는 것을 ‘놀이’로 인식하며 성장한 세대라는 견해다.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김난도 교수는 “20대는 놀이문화가 소비문화를 대신한 첫 세대로, 과시적 차원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명품을 구입한다”며 “일품 명품주의 등 실속적인 특성이 강해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그러나 “교육이나 여행 등 내면적인 가치를 높이는데 돈을 투자하지 못하고 지나친 소비에만 집착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상민 수석연구원은 “산업발전이라는 면에서 고급 소비 문화를 형성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해외 명품 소비를 무조건 비판하기보다는 국내 명품 브랜드를 키워 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만드는 실질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배현정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2/04/23 17:49


배현정 주간한국부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