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영화세상] 제목이 튀어야 산다?

한국영화 제목이 자유로워지고 있다. 영어 제목은 기본이고, 구어체적 표현이나 정반대로 한 문장을 제목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과거 홀수글자로 해야 하느니, 명사형으로 해야 하느니 하는 불문율이 깨진지 오래.

이제 제목은 사람들이 얼른 기억할 수 있고, 호기심을 자극하며, 영화의 주제나 소재를 명쾌하게 드러내는 신세대 감각이어야 한다. 코미디 일수록 그런 현상은 더욱 심하다.

육상효 감독의 아이언 팜(Iron Palm). 제목만으로는 어떤 영화인지 잘 모른다. 무슨 뜻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아이언 팜은 옛날 소림사 스님들이 나오는 홍콩 무술영화에서 가끔 보았던 뜨거운 모래에 손을 넣어 단련시킨다는 철사장(鐵沙掌)을 말한다. 무협액션영화도 아니면서 이런 제목을 단 것은 5년 전 헤어진 애인 지니(김윤진)를 찾아 미국 LA로 온 백수건달의 최경달(차인표)가 모래 대신 전기밥통 속의 뜨거운 밥에 손을 찔러 넣는 철사장을 하기 때문이다.

굳이 영어로 한 것은 경달의 미국이름 역시 아이언 팜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철사장이 고통을 고통으로 다스리는 방식이기 때문에 이 제목을 붙였다”고 했다. 코미디지만 웃음 속에 슬픔과 아픔 같은 것을 담았다는 의미도 된다.

역시 영어 제목인 ‘정글 쥬스’(감독 조민호)도 쉽게 뜻을 알 수 없다. 온갖 약을 뒤섞어 만든 강력한 환각제라는 뜻이다. 서울 청량리 뒷골목의 착하고 어리버리한 양아치 기태(장혁)와 철수(이범수)가 마약 뭉치를 빼돌리는 모험이야말로 ‘정글 쥬스’를 마시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붙였을 것이다.

‘아 유 레디?’나 ‘후 아 유?’처럼 우리 말로 ‘준비됐니’ ‘너 누구야?’해도 충분한데도 영어 제목을 굳이 붙인 영화도 있다. 할리우드 영화가 오래 전부터 원제 그대로 개봉하고 있고, 요즘 일상에서 영어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회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물론 우리말보다 영어가 더 고상하다는 그릇된 사대주의도 작용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감독 유하)나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감독 모지은)는 아예 완결된 문장이다. 보안시스템 입찰을 두고 남녀 라이벌이 경쟁하는 신인 고은기 감독의 영화는 제목이 ‘뚫어야 산다’이다. 간결한 서술형으로는 ‘두 사람이다’ 도 있다. ‘라이터를 켜라’ ‘일단, 뛰어’같은 명령형 문장도 이젠 어색하지 않다.

박찬욱 감독이 ‘복수는 나의 것’을 내놓자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와 이름이 비슷한 여성 감독 박찬옥은 자신의 영화에 ‘질투는 나의 힘’이란 똑 같은 문장구조로 제목을 달았다.

김동원 감독은 자신의 단편을 장편으로 다시 만들면서 언뜻 들으면 무슨 소리인지 모르지만 코믹한 영화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해적, 디스코왕이 되다’라는 제목을 그대로 쓴다.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이나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 같은 것도 과거에는 엄두도 내기 힘들었던 공격적인 영화제목. 한국영화 28편을 패러디한 장규성 감독은 아예 ‘재밌는 영화’라고 강조했고, ‘로드 무비’라고 제목을 장르로 말하는 영화도 촬영중이다.

이처럼 영화제목이 정형화를 벗어나 감각화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영화의 이미지와 인지도를 결정하기 때문. 충무로 영화 기획자들은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일단 제목이 ‘튀면’ 영화 팬들의 관심이 다르다. 관객들도 제목이 평범하면 영화도 재미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목만 튄다고 영화가 성공할까. ‘친구’나 ‘공동경비구역 JSA’는 제목이 별나서 성공했나. 결국 승부는 완성도와 새로운 소재에 있다. 다만 제목은 그것을 위한 시작일 뿐.

이대현 문화부 차장

입력시간 2002/04/23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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