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크 눈]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이 있다. 정치 9단인 김대중 대통령이 한 말로 정치는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 대통령 경선에서 사퇴한 이인제 전 고문이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합세해 ‘중부권 신당’을 창당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우리 정치의 구태인 지역정서를 볼모로 김 총재와 ‘판깨기’의 일인자 이 전 고문이 힘을 합친다는 것이다.

아무리 정치가 생물이라도 이는 정도(正道)를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는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전 고문은 한나라당 시절 경선 결과에 불복, 한국 신당을 창당했고 이번 민주당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세가 밀리자 중도 사퇴하는 등 민주주의의 기본인 경선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보를 해왔다.

경선 불복과 중도 사퇴에 이어 지역정서를 볼모로 정치를 하겠다는 이 전 고문의 ‘정치 철학’은 참으로 뛰어나다. 정치인이 아무리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만 이 전 고문은 경선을 끝까지 하겠다면서 이를 번복하고 사퇴하는 용기도 보였다.

이른바 ‘IJP’연대가 과연 현실 정치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쉽게 답할 수는 없지만 중부권 신당추진론자들은 신당 창당이 이뤄진다면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자민련의 경우 충청당, 보수, 노쇠 이미지 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 전고문과 힘을 합쳐 경기 강원 인천 대구 경북 일부 등 중부권으로 영역을 확대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또 중부권 신당이 출범할 경우 12월 대선에 상당한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이며 중부권 신당이 민주당과 한나라당 후보의 양강 대결에서 캐스팅 보트 역할도 할 수 있다. 이 경우 현재 민주 한나라 자민련의 3당 구도를 새롭게 정립해 대선 이후에도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같은 시나리오대로 과연 판이 벌어질 수 있을까. 이 시나리오가 실제 상황이 되려면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다.

바로 유권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것이다. 민주당의 경선레이스에서 보듯이 우리 정치는 이제 ‘3김 시대’를 청산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화하고 있다. 노풍(盧風)은 봄바람처럼 철이 되면 부는 바람은 아닐 것이다. 지역구도를 기반으로 하는 3김 정치에 식상한 유권자들이 정치권에 주문하는 변혁의 요구일 것이다.

한나라당도 역시 이 같은 변화를 수용, 이회창 후보가 총재직을 내던지고 맨몸으로 났다. 민주와 한나라당의 싸움은 지역 구도가 아닌 보ㆍ혁 대결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색깔론만 배제한다면 양당의 대결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JP는 “석양의 노을이 붉게 질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말한 바 있다. 산전수전 다 겪은 JP가 마지막을 영예롭게 마감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JP가 유종의 미를 거두려면 참신하고 깨끗한 인물을 내세워 민주와 한나라당 후보에 맞서는 길 밖에 없다.

그런데 하필이면 민주주의의 룰을 깬 인물과 손을 잡으려 하는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 사위인 JP가 평소 ‘리틀 박정희’를 자처하던 이 전 고문과의 인연 때문인가.

3김 시대의 종말은 최근 김 대통령의 세 아들 문제가 불거지면서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정치적이 아니라도 생물학적으로도 3김의 시대는 이미 선을 넘었다. 21세기의 첫 대통령은 3김의 유산을 과감하게 청산해야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지역주의이다. 또 국민의 뜻을 저버린 인위적인 정치권의 이합 집산이다. 해방 이후 탄생된 정당들 중 그 이름과 정치노선 등을 아직도 유지한 정당은 없다. 정치가 생물이 아닌 화석이었으면 오히려 나았을 것이다. 새로운 정치는 유권자의 진정한 뜻을 존중하는 것에서 비롯돼야 한다.

21세기에도 중국의 전국시대처럼 군웅들이 지역을 기반으로 할거해야 하는가.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려야만 하는가.

이장훈 주간한국부 부장

입력시간 2002/04/24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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