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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기품은 이회창, "딱 걸렸어"

여권 폭로공세에 고강도 대응, 정권퇴진운동도 불사

“현 정권은 이성을 잃은 집단이다.” “미친 듯이 허위사실을 조작하는 이상한 짓을 한다면 이 정권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더럽고 저질스러운 일을 하는 자들은 정치를 못하게 할 것이다.” “발언을 후회하게 만들 것이다.”

4월 21일 기자회견을 자청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평소에 쓰지 않던 감정 섞인 단어를 동원해 가며 현 정권을 격하게 비판했다. 이 후보는 이날 분을 채 삭이지 못했는지 TV카메라와 녹음기 등을 치우도록 한 뒤 막말 수준의 심한 언사까지 거침없이 썼다.

지난 주말 이후 이 후보의 말 한 마디 한마디에 시퍼렇게 날이 섰다. 이 후보 주변에서조차 “1998년 야당탄압이 한창일 때도 저렇게까지 흥분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고 할 정도다. “독기(毒氣)를 품었다”는 말까지 나온다. 폭로공세에 대한 맞대응으로만 보기에는 예사롭지 않다는 지적이다.


본선체제로의 전환 신호탄

정가에서는 이를 이 후보가 경선체제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본선체제로 전환하는 신호탄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 후보의 ‘변신’이 가시화된 것은 17일의 인천경선 압승 이후 18일에 열린 울산 경선에서도 압승을 하면서부터다. 이 후보 선대본부 한 인사는 “18일 울산, 20일 제주 경선은 최병렬 후보의 ‘영남후보론’과 이부영 후보의 ‘개혁 대안론’이 허상임을 확인돼 경선체제가 사실상 마무리되는 시점이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밝혔다.

때마침 터진 외환(外患)도 경선으로 흐트러졌던 당 분위기를 대여투쟁 국면으로 반전시키는데 원군으로 작용했다.

먼저 민주당 함승희 의원이 16일 국회 법사위에서 “가회동 빌라는 이 후보의 부인 한인옥 여사가 15억원에 구입한 것”이라며 ‘빌라게이트’ 불씨를 되살리면서 당 분위기는 일변했다. 19일 민주당 설 훈 의원이 “최규선씨가 2억5,000만원을 한나라당 윤여준 의원에게 줬고 이회창 후보에게까지 흘러 들어갔다”며 의혹을 제기하자 이러한 흐름은 더욱 가속됐다.

결국 이 후보는 민주당의 공세를 타고 자신을 중심으로 당 체제를 급속히 다잡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실제로 그는 17일 부산에서 격앙된 모습으로 최근 들어 처음으로 ‘정권퇴진’을 직접 언급했고, 20일과 21일 제주와 서울에서 연달아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고강도 발언을 퍼부었다.

결국 민주당이 점화한 폭로전이 이 후보를 경선 후보에서 당의 대표이자 대여투쟁의 중심적인 위치로 자연스레 되돌려 놓은 셈이다.

한 당직자는 “민주당의 잇단 폭로가 대통령 세 아들 등의 권력비리 물타기용이나 이 후보 흠집잡기용이었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본 셈”이라며 “현 정권이 선거 중립을 완전히 포기한 만큼 이 후보의 정권 핵심을 겨냥한 투쟁을 통해 당이 재 결집돼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부영 후보가 “민주당이 한나라당 경선에 음모적으로 개입해 이회창 후보를 돕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다.

게다가 이 후보는 사적인 감정까지 불붙은 상태다. 이 후보의 장모 김분남(89)씨가 16일 밤 TV뉴스에서 함 의원의 주장을 접한 후 뇌출혈로 쓰러진 후 이 후보가 상당히 격앙돼 있다고 한다. 부친과 사돈에 이어 장모까지 피해를 입었다는 분노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이 후보는 19일 한 방송사 라디오인터뷰에서 가족문제를 언급하다 감정이 북받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기도 했다.


정권과 한번 붙겠다

4월말에서 5월 중순까지가 대여 공격의 최적기라는 점도 중요한 고려 사항이라는 것이 이 후보 주변의 설명이다. 민주당 경선이 사실상 막을 내리면서 ‘노풍’이 주춤한 현 시점에 반드시 정국 반전의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5월 초순을 넘어서면 월드컵과 지방선거의 열기 속에 대여 공세가 국민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고 떨어진 지지율이 상당기간 고착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정계개편 움직임에 대한 수동적 대처에만 급급하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때문인지 이 후보 측 한 인사는 “비장한 심정으로 정권과 한 번 붙겠다”면서 “이번 일주일이 아주 중요한 싸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주 전장은 당분간 설 의원 주변에 형성될 전망이다. 한나라당과 이 후보 측은 여권의 정권연장 시나리오가 ‘노무현 띄우기’와 ‘이회창 흠집내기’ 의 두 축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설 의원을 궁지로 몰아붙이는 데 성공하면 앞으로 여권의 치고 빠지기식 폭로전을 막고 결과적으로 ‘이회창 흠집내기’ 를 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윤 의원도 “개인 차원의 공방이 아니라 여권의 큰 구도를 뒤엎으려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정권의 부정부패 의혹은 물론 부도덕성까지 자연스레 부각시키고, 현 정권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노 후보 흠집내기로까지 이어 나간다는 것이 이 후보 측 복안이다. 권력형 비리 국정조사, TV청문회, 특검제 등 요구가 여당의 철저한 무대응 전략으로 인해 사실상 벽에 부딪혀 있다는 점에서 설 의원 공략은 이 후보측과 한나라당이 구사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기도 하다.

윤 의원이 19일부터 철야농성에 들어가고 한나라당 의원들이 20일부터 연일 설 의원 사무실을 찾아 “녹음테이프를 내놓으라”고 압박하는 등 ‘큰 싸움’(한나라당 남경필 대변인)은 이미 벌어지고 있다. 박관용 총재권한대행과 이재오 총무 등은 21일 윤 의원 사무실에서 대책회의를 갖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는 설 의원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윤 의원이 검찰에 자진출두해 설 의원에 대한 검찰조사를 강제하는 전술도 심도 있게 논의됐다.

한나라당과 이 후보 측은 상당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에서는 설 의원을 두고 “딱 걸렸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다. 이 후보 선본 상황실장인 김무성 전 총재비서실장은 “최성규 총경 도피와 설 의원 발언은 여권의 오버액션이자 치명적인 실수”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 당직자는 “윤 의원이 최규선씨로부터 직접 돈을 받지 않았더라도 제3의 인물을 통해 최씨의 돈인지 모르고 받았을 가능성도 있지 않느냐”고 우려했다. 이 후보의 ‘독기’가 오히려 제 발등을 찍는 ‘도끼’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만은 없다는 이야기다.

안준현 기자 dejavu@hk.co.kr

입력시간 2002/04/24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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