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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巨匠]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우리시대의 巨匠]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마녀의 옷을 벗은 열정의 화신

더 이상 객석을 전율시키는 ‘마녀’는 없었다. 초절 기교를 접어 둔 그는 ‘모두의 누이’였다. 4월 20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소나타 1번 g단조’가 그의 활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자신의 재능을 언제나 신에 복속 시킨 바로크의 거장이 남긴 최상의 걸작품이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54)를 통해 재현되는 현장이었다.

외국의 큰 무대라면 상상조차 힘든 일이었다. 외국서는 반주자들이 솔리스트 혼자만 나가는 독주곡을 꺼리기 때문이다. 정경화는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고난도의 소품들을 위주로 자신의 음악을 채색해왔다.

3년 만에 고국 콘서트를 갖는 그는 무려 한 곡 연주에 17분에 달하는 솔로곡을 서슴없이 택했다. 고국에 왔다는 징표이다. ‘


아낌없이 들려준 데뷔35주년 기념무대

2,600석의 좌석을 꽉 채운 관객들은 그가 아낌 없이 선사한 무려 6곡의 앵콜곡에 행복감을 만끽했다. 하모닉스, 피치카토, 더블 스톱(겹음 연주) 등 기교 과시용의 현란한 소품들에서부터 미국 민요 ‘금발의 제니’까지 펼쳐지자 점잖은 중년 관객들까지 기립 열광했다.

이 같은 앵콜 무대는 외국에서 라면 생각할 수 없는 풍경이다. 하지만 그는 고국 팬들이 자신을 다시 보기 위해 기다려야 했던 3년 세월의 두께를 안다. 한국인들은 그 자리가 그의 데뷔 35주년 기념 무대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끊이지 않는 기립 박수를 달래느라 15차례나 무대를 들락날락 해야 했다. 일부 시간이 급한 관객들이 나가고도 끊일 듯 계속 이어져 간 콘서트가 진짜로 막 내린 것은 정규 순서가 끝나고 30분 뒤인 9시 50분.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출발일 뿐이었다. 청중은 넓은 홀 가득히 늘어 선 장사진으로 변했다. 세계 정상의 거장이 친히 써 주는 이름 석자를 받아 들고서야 사람들은 연주회장을 빠져 나갈 수 있었다.

“한국 청중은 제 마음에 들어요. 반응이 금방 오거든요. 집중해서 듣기 힘들 어린이들까지 경청해 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정경화에게 뜨거운 환대가 있는 고국은 언제나 마음 푸근한 곳이다. 첫날 연주회의 아찔했던 순간도 그래서 그에게는 문제가 될 수 없었다. 18일 밤 수원 경기문화예술회관. 10분간의 휴식을 가진 뒤 2부 무대를 막 시작하려는 찰나였다.

핸드폰 벨 소리가 중간 뒷편 객석에서 울렸다. 바스락거림이 완전히 잦아 든 뒤 내려 앉은 정밀(靜謐) 사이에 틈입한 가냘픈 핸드폰 벨소리는 유달리 크게 들렸다. 그 같은 상황에 익숙해진 한국인이라도 가슴이 철렁했던 순간이었다. 상상조차 하기 힘든 상황에 맞닥뜨린 미국인 반주자 로버트 쿨럭의 연주는 완전히 망가졌다.

그러나 정경화는 흔들림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객석에서 꿈쩍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신경이 거슬려 제대로 해 나갈 수 없었다.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음악은 여행(journey)이니까요”.

먼 길을 가노라면 당연히 비도 오고 눈도 온다. 눈이나 비와 동행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 한다면 그 여행은 괴로울 수 밖에 없다. 이제 정경화는 그를 줄기차게 따라 온 수식어 마냥 ‘동양의 마녀’가 아니다.

1967년 레벤트리트 콩쿠르 우승 이후 차갑다는 역설적 평을 들을 정도로 격렬한 활놀림을 통해 가슴을 파고 들었던 그는 지금 이웃집 아주머니 같은 모습으로 돌아 왔다.

그는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화를 트기 위해 연주한다. 이번 연주곡인 요하네스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 중 2악장이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그 속에 압축된 작곡자의 역경을 이제는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력의 활놀림 보여주던 완벽주의자

“아직 혀가 덜 풀려서 그래요”. 군데군데 낯선 국어 표현이 나온다거나 가끔씩 영어 단어가 불쑥 튀어 나오는 상황에 대해 그는 솔직히 양해를 구했다.

“이 단어를 뭐라 하더라? 듣기 답답하죠?” 그러나 음악 세계에 관해 말할 때 그는 진지하고도 여유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소나타나 실내악에 집중하고 싶은데 매니저들이 협연 무대에 너무 비중을 두는 바람에 뜻대로 되지 못했죠.”

뉴욕에서 공부한지 6년째(19세)인 1967년 레벤트리트 콩쿨에서 공동 우승한 이래, ‘조국 근대화’의 길에 내몰려 팍팍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한국인들에게 그는 빛이었다.

더욱이 자기 자신은 아직 도저히 안 된다며 출전을 고사했던 터라 당시 기억은 새로울 수 밖에 없다. 결정적 계기는 콩쿨 우승 덕에 따낸 1970년 런던 로열 페스티벌홀에서의 유럽 데뷔 무대였다. 대가 이츠하크 펄먼이 개인적 사정으로 협연을 할 수 없게 되자 당시 막 이름을 얻기 시작한 그에게 대신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공연 예술 특유의 관행 덕택에 그는 동양의 낯선 소녀에서 일약 스타가 됐다. 이후 세계의 대도시를 찾아 다니며 경력과 명성을 쌓아갔다. 일본 등에서 연주 요청이 쇄도했고 세계적 음반사인 데카에서 녹음 제의가 들어왔다.

런던 데뷔 무대에서 협연했던 차이코프스키와 시벨리우스 협주곡을 다시 스튜디오에서 녹음해 발표한 음반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계적 메이저 음반사와 손잡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후 그는 거침 없는 몸놀림과 강렬한 해석으로 전세계 클래식 음악계에 깊이 각인돼 왔다. 마력의 활놀림은 곧 바로 음반사의 주목을 받게 돼 일련의 대편성 협주곡 음반들이 줄을 이었다.

1973년의 월튼과 스트라빈스키 협주곡 음반은 에디슨상을 따냈다. 1974년에는 전설의 거장 게오르크 솔티가 지휘하는 런던 필과 녹음한 엘가의 바이올린 협주곡 음반은 그를 일약 대가의 반열에 끌어 올렸다.

본인이 원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는 당시 서구 사회에서 막 태동하던 여성해방운동과도 잘 부합됐다. 동양에서 온 작은 소녀가 내뿜는 강렬한 개성은 단번에 서양인들을 사로잡았다. 왜 그랬을까? “여자가 내는 소리란 작다는 편견이 싫어 일부러 소리를 크게 내려 무척 노력했다”고 그는 답한다. 약소국으로부터 온 작은 소녀의 음악이라는 고정 관념은 엄청난 심적 부담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특유의 완벽주의까지 중첩, 덕분에 그가 만든 음반은 별 다섯개가 모자랐다. 인기 소품인 엘가의 ‘사랑의 인사’ 같은 경우 그 곡의 연주에 필요한 기교를 터득하는 데는 5분이면 충분했으나 녹음에는 2년의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 2,30대 그의 완벽주의는 거의 강박적이었다.

음악의 해석을 두고 자기 주장을 전면에 내세워 주도권을 가지려 했기 때문에 지휘자들과 치러야 했던 마찰은 유명하다. 특히 하이팅크처럼 카리스마를 갖고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지휘자들조차 동양의 마녀에게 길을 터주어야 했다.

“내 입맛에 안 맞으면 조금도 안 했죠.” 까다롭기 짝이 없는 연주자라며 내로라 하는 매니지먼트사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 무리가 아니었다. 변덕스런 공연계의 생태를 몸으로 익힌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세계적 매니지먼트사 ICM의 데이비드 포스터 사장과 일체의 공연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그러나 가정이 그를 변화시켰다. 두 아들의 어머니가 된 그는 ‘여유ㆍ부드러움ㆍ중후’의 이미지로 집약되고 있다. 뉴욕의 집으로 돌아가면 사업가 레게트(56) 사이에 둔 두 아들 재곤(17)과 유진(14)을 둔 평범한 어머니가 된다.

재곤은 피아노에, 유진은 라커로스라는 신종 운동에 재주가 많다. 아이들의 학교일 봐주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 고양이 두 마리까지 키우니 집안은 늘 북적댄다.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찾아 낸 귀여운 고양이 덕에 가정이 대단히 화목하단다.


온화함은 가정이 가져다준 선물

가정을 갖기 전까지 그의 연주는 털끝만큼의 빈틈도 용납 않았다. 무대 위 공간이 좁아라 지독스레 움직이며 연주하는 그는 무대에서는 신기(神氣)마저 느껴졌다. 변화의 조짐은 1980년대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힘이 넘치고 격정적이기까지 하던 연주가 온화ㆍ유쾌한 것으로 바뀌어 간 것이다. 가정이라는 새로운 생의 패러다임이 가져다 준 선물이었다. 세계를 주름잡던 여인이 가정을 갖는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문제는 아니었다.

둘째를 낳고 바이올린을 계속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심각히 고민에 빠져야 했던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연주자로서는 아무 생각 않고 커리어만 쌓아가야 했던 이 시절을 그는 가장 힘들었던 고비로 꼽는다.

그의 역경에는 신비주의적 이해가 필요한 면이 없지도 않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시절, 1989년 은혜를 받았어요. 예술인으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역할에 고루 충실할 수 없다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던 때 였죠.”

원래 기독교 집안이기도 했지만 부친의 사망을 당하고 보니 영적 문제는 각별한 무게로 그를 채근했다. 1999년 귀국 독주회 때 수익금 전액을 교회에 기부했던 일은 문화계의 화제였다. 그가 크리스천이란 사실이 처음으로 널리 알려졌던 일이기도 했다.

유진 박을 극구 칭찬하는 대목에선 분명 달라진 면모가 느껴진다. 1998년 뉴욕 연주회 때였다.

“처음 듣는 자리였지만 기막혔죠. 그냥 연주자가 아니라 대단한 창조성이 느껴졌어요. 그 재주가 도태되지 않기를 바래요.”

재즈건 국악이건 한 데 녹여 버리는 무서운 후배를 알아보는 눈을 지닌 그는 그러나 자신은 자기 자리를 지키겠다고 한다. “아직도 바흐 프로젝트는 미완”이라며 “앞으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6곡)에 도전하겠다”고 밝히는 그는 자신의 몫을 알고 있는 듯하다.

장병욱 주간 한국부 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2002/04/24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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