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빛 밝히는 밀리오레

오후 6시 30분. 빌딩군이 밀집해 있는 명동. 땅거미가 내려앉자 서둘러 퇴근을 마친 직장인들이 잰걸음으로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한다. 하루 유동인구가 10만 명을 넘는 명동은 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일 틈 없지만 주류를 이루는 사람은 시간대별로 다르다.

낮 시간이 여유로운 주부들과 젊은 학생들의 공간이라면 6시 이후의 명동은 직장인들의 천국이다. 특히 밀리오레가 문을 연 이후 명동의 지형도를 직장인들이 바꾸는데 한 몫하고 있다.

지하철 4호선에서 바로 연결되는 명동 밀리오레 입구. 갖가지 표정의 사람들이 설렘을 안은 채 서성이고 있다. 한쪽에 마련된 특설무대에는 어지럽게 돌아가는 사이키 조명 아래에서 댄스팀이 현란한 춤 솜씨를 뽐내며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연신 시계를 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 반가운 얼굴로 팔짱을 낀 채 환한 조명 속으로 총총이 들어서는 사람들, 연인끼리, 친구끼리, 동료끼리…. 혼잡하기 그지없지만 이들 중 누구에게서도 사무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마주치는 창백하고 침체된 표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결같이 부풀어 있는 표정이 역력하다.

밀리오레에서 일주일 중 사람이 가장 많이 붐비는 날이 금요일이라면 하루 중 손님이 가장 많은 시간대는 직장인들이 퇴근하고 난 직후인 오후 6시 이후부터다. 시간이 부족한 직장인들에겐 하루 일과를 마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쇼핑할 수 있는데다 늦은 밤까지 시간적 구애를 받지 않고 데이트를 즐길 수 있어 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

여성복코너에서 만난 이은영(회사원·26)씨는 사무실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데 제격이라 일주일에 두 세 번은 퇴근 후 꼭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실제로 이씨와 같이 꼭 쇼핑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시간 부족하고 갈 데 마땅치 않은 직장인들에겐 밤늦은 시간까지 볼거리와 실속을 안겨주는 대형 쇼핑몰은 매력적인 장소다.

아직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대부분 여성들이지만 최근 들어 달라진 것은 더 이상 쇼핑이 여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남성들도 심심찮게 마주칠 수 있다. 4층에서 남성복 코너를 운영하고 있는 최모씨는 최근 남자들끼리 쇼핑을 하러 오는 경우도 많아졌다고 전한다.


>데이트 겸해 원스톱 쇼핑 가능… 직장인들의 '밤무대'

이곳이 직장인들에게 인기장소가 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시장하면 떠오르던 왁자한 소음과 지저분하고 복잡한 통로, 빈발하는 상인과 손님간의 실랑이… 이런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백화점 못지 않게 세련된 디스플레이, 쾌적한 내부시설,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의류, 신발, 잡화에 이르기까지 한꺼번에 해결 가능한 원스톱 공간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이벤트와 각종 경품잔치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거기에 월드컵 기간에 대비해 가격표시제를 의무화하는 등 재래시장의 영세성을 벗어나려는 노력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밀리오레 홍보실에 근무하고 있는 유미현씨에 따르면 동대문과 달리 이곳의 주 타깃은 직장인들이라서 정장 매장을 1, 2층에 전진 배치했다고 한다.

건물 내에 피부과나, 성형외과 등 병원구역을 형성해 늦은 시간까지 진료하게 된 것도 직장인들을 위한 배려라고 한다.

단순히 상품을 구입하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덩달아 명동의 밤시간도 달라졌다. 오후 11시만 되면 일찌감치 문을 닫던 예전과 달리 음식점이나 부대시설의 영업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밤 11시. 늦은 시간이지만 사람들이 좀처럼 줄어들 줄 모른다. 단지 분주한 발걸음과 도무지 시간을 짐작할 수 없게 만드는 밝은 조명만이 한데 어우러져 건물 밖의 어둠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파는 곳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서민들의 갖가지 소박한 꿈과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있기 때문이다. 겉모습이야 현대식으로 달라졌다고 해도 밀리오레와 같은 우리 시대의 시장은 또 그 나름의 의미와 기능을 가지고 오늘을 상징하는 그 무엇이 되고 있었다.

서명희 자유기고가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