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접으며] 저격수의 양심

군과 경찰에는 저격수 임무를 맡은 요원들이 있다. 이들은 국가 주요 행사가 있을 시 주변 취약지에 잠복해 국가 원수 등 VIP들이 행사를 진행하는 동안 수상한 적들의 동태를 살피고, 이들을 저격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정치권에도 소위 말하는 저격수가 있다. 전ㆍ현직 대통령이나 여야 총재, 각 당의 대선 후보 같은 주요 인사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정치인이 그들이다. 이들 정치인 저격수들은 상대당 최고위 인사의 비리나 약점을 폭로해 원색적인 톤으로 공격하는 악역을 맡는다.

그 대가로 이들은 최고층으로부터 신뢰를 받거나, 당내 입지를 강화 시키기도 한다. 현재 한나라당에는 김 대통령과 일가를 집요하게 공격하는 홍준표 의원이, 민주당에는 이회창 대선 후보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설훈 의원이, 각각 이 역할을 하고 있다.

정치인 저격수들은 혼미 정국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요즘 같이 지자체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정치 저격수들의 임무는 그야말로 정국 주도권을 좌지우지할 만큼 막중하다.

하지만 최근 여야 저격수들은 ‘너무 의욕만 앞선 것 아니냐’는 지적을 많이 받는다. 민주당 설훈 의원은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최기선씨가 이(회창) 전총재에게 전해 달라며 윤여준 의원에게 2억5,000만원을 전달했고, 이 전총재의 방미 일정에도 관여했다”고 폭로했다.

세 아들 비리로 곤혹스럽게 된 김 대통령을 엄호하고자 한 설훈 의원의 큰 뜻(?)은 오히려 김 대통령과 노무현 대선 후보에게 부담을 주는 역작용을 초래했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도 이희호 여사가 외교 행낭이 아닌 일반 수화물로 미국에 갔음에도 이를 확인하지 않은 채 “영부인이 외교 행낭에 거액의 외화를 가지고 나갔다”는 식으로 폭로하는 우를 범했다. 여야의 두 저격수 모두가 과잉 충성으로 애매한 아군에게 방아쇠를 당긴 꼴이 됐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이런 실수가 있은 다음에 취하는 저격수들의 행동이다. 이들은 자신의 실수가 거의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공식적인 사과나 진실 공개는 하지 않은 채 그냥 얼버무리며 넘어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정치적으로 활용 가치가 소멸하면 의혹만 남긴 채 유야무야 덮고 넘어가 버린다. 우리 정치가 모략과 비밀 야합 의혹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무책임한 폭로 정치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2/05/03 11:38


송영웅 주간한국부 heroso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