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巨匠] 작곡가 신중현

한국적 록의 르네상스를 꿈꾼다

지난 시절, 그는 차라리 각설이였다. 무위도식의 대명사쯤으로 여겨졌다. 세월이 흘러 그의 열정과 주체할 길 없는 끼는 이제 예술이 돼 ‘무위자연’의 경지에서 노닐고 있다. 1994년 앨범의 이름을 그는 그렇게 달았고 한국 가요사는 최초의 전자 기타 산조 음반으로 서술했다.

대마초 사건, 가요 정화 등의 올가미로 정권은 틈나는 대로 그를 쓰러뜨리려 무진 애를 썼다. 그는 그러나 바람보다 일찍 눕고, 바람보다 일찍 일어나는 풀잎이었다.

한국인들에게 그의 음악은 공기 같은 그 무엇이다. 그의 노래는 그대로 민중의 담론이었다. 지난 시절 웬지모를 짜릿한 불온감에 들떠 각설이 타령,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를 외쳐 보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 히트곡을 중심으로 새롭게 쭉 연주해 오고 있죠. 옛기억들이 새록새록 살아나요.” 16년째 자리 잡아 오고 있는 서울 송파구 문정동의 개인 스튜디오 ‘우드스탁’의 곰삭은 바닥 널판지 위에서 신중현(63)은 낯익은 전자 기타를 쓰다듬는다. 지판위를 누비는 손놀림은 여전히 날렵하다.

낡아 빠진 펜더 기타에서는 그의 과거 시간과 미래상이 함께 배어 난다. 왕년의 히트곡들을 육순의 노장이 다시 부르고 연주한다. 게다가 작곡해 두고 발표는 미뤄왔던 100여곡까지 수록할 예정이다. . “국내서는 전례 없던 일이죠.”

편집은 물론, 요즘 흔해빠진 컴퓨터 작업까지도 철저하게 배제됐다고 그는 강조한다. 지독스레 철저한 과거 회귀 방식이다. “과거 아날로그 시절, 마이크 하나 가운데 놓고 쭉 둘러 서서 취입하다 틀리면 처음부터 재녹음하던 관행을 여기서 그대로 따라하기로 했어요.

살아 있는 음악이란, 단 1분만 지나도 방금 전의 소리는 없어지고 말거든요.” 멀티 컴퓨터 등 첨단 기술탓에 음악은 타락했다고 그는 굳게 믿고 있다. 1980년대초 대중 음악계로서는 국내 최초로 컴퓨터 뮤직을 시도해봤지만 얼마 안 가 인간이 철저히 배제된 소리에서 음악의 타락을 읽고 절연했다.


순수한 저항력 이미지의 명곡 수두룩

그는 여전히 록의 순수한 저항성을 꿈꾸고 있다. “갈 날도 머잖았다”는 말은 이 노장의 엄살이라는 사실을 손때 반질반질한 기타는 말해 준다. 날렵한 핑거링은 여전하다. ‘빗속의 여인’, ‘커피 한 잔’, ‘님은 먼곳에’, ‘봄비’ 등이 전부가 아니다.

이곳은 ‘무위자연’을 비롯, ‘김삿갓’(1997년) 등 최근작들의 탄생을 지켜 보았다. 그것은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24일 우드스탁에서 50㎙ 떨어진 곳에 새로이 마련한 기획사 ‘신중현 M&C’는 그와 그를 따르는 젊은 음반기획자 10명이 부대낄 새 전초 기지이다. ‘음악과 문화(Music & Culture)’의 약자이다.

“작품 쓰고, 연습하고, 손님 맞느라 늘 밤을 새죠. 이곳 우드스탁에 와서 지은 작품이 100곡은 넘어요. 히트 친 건 없지만.” 도교 사상에 심취해서일까, 그에겐 정확한 수치따위는 저잣거리의 악다구니일 뿐이다. 인기의 정점에서 본인에게 딴죽 걸던 정권의 심술도 어렵사리 거쳐 낸 그는 이제 자신의 운명을 읽고 있다.

“수백곡 된다”고만 할 뿐, 본인조차 자신이 쓴 작품수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 한다. 아니, 그의 심드렁한 표정은 그런 데에는 관심이 없다고 넌저시 말해준다. 그러나 한국고음반연구회의 집계에 의하면 그가 발표한 앨범(음반) 수는 모두 191장이다.

이 수치에는 최근 가요계의 무시못 할 요소인 노래 반주용 레이저 디스크가 33장 포함돼 있다. 그는 약 300여곡을 발표해 왔는데, 1969~1974년의 만 5년간 발표한 곡이 무려 190여곡이었다. 창조력의 빅 뱅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재키신(1958년), 애드훠(1964년), 블루즈 테츠(1966년), 덩키즈(1968년), 퀘션스(1970년), 정성조 캄보 밴드(1971년), 더 멘(1971년), 엽전들(1973년), 뮤직 파워(1980년), 세 나그네(1983년)…. 자신의 이름 석자 아래 명멸했던 그룹들이다.

불온한 선동성때문에 때로는 사이키델릭 밴드라고도, 때로는 락 밴드라고도 불렸던 그의 사단이다. 그들 없이 우리 가요사가 온전히 서술될 수 있을까?

그가 없는 한국 가요사는 퇴행과 자조를 기본 정서로 하는 뽕짝 아니면 달큰한 사랑 타령 천지가 됐을 지도 모른다. 그 덕에 우리 가요는 저항과 공격의 푸른 기운을 유지해 왔다. 신중현은 그 핵심 지분을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한국적 록의 대부이다. 그의 삶을 들여다 보는 것은 한국 록의 역사를 되새기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한시대를 풍미한 광기와 열정의 세계

6ㆍ25 전쟁으로 고아가 된 배고픈 소년에게 기타와 팝송은 꿈 꿀 권리를 안겨 주었다. 야간중학(동양중) 2학년부터 놓아 본 적 없는 기타 덕에 1958년 20살의 나이로 미 8군의 쇼 밴드 멤버로 밥벌이를 하면서 그의 음악은 출발했다.

엄청난 잡식성이었다. 재즈를 주로 하던 장교 클럽, 컨트리 음악 중심의 상사 클럽, 로큰롤에 맞춰 몸을 흔들던 사병 클럽 등 전혀 이질적인 세 종류의 무대를 만족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엘비스 프레슬리(팝)에서 지미 헨드릭스(록)까지 한 손에 녹이는 현란한 기교에 미군들은 완전 매료, “We want Jackie!”를 연호했다. 재키란 당시 그의 애칭이다. 소문을 들은 미국 본토서 그에게 스카우트 제의까지 했으나, 매니지먼트사가 자신을 놓치기 싫어 그 사실을 숨기는 바람에 당시는 감쪽같이 몰랐던 일이다.

미군 무대 생활 3년은 ‘비틀즈’를 본뜬 국내 최초의 록 그룹 ‘애드 훠(Add 4)’ 결성으로 이어졌다. 양키들만의 문화였던 록이 이들의 곡 ‘빗속의 여인’을 신호로 우리 음악이 됐고 음악감상실은 물론 시민회관마저 그의 음악에 길을 터주었다.

일본의 엔카가 뽕짝이라는 형식을 얻어 한국인의 생활로 스며들었듯, 서구의 소울과 로큰롤은 신중현을 관통해 한국적 일상에 편입된 것이다.

그러나 기획ㆍ홍보란 개념이 아예 없던 시절이었다. 인기를 생활에 연결시키는 수단을 몰라 늘 적빈에 허덕이던 그는 3년만에 미 8군 무대로 돌어가야 했다.

미군 무대 생활로 ‘펄 시스터즈’를 알게 된 그는 그룹 ‘덩키즈’를 조직하고 독립, 일련의 대박을 터뜨린다. ‘님아’를 필두로 ‘커피 한 잔’, ‘떠나야 할 그 사람’ 등은 당시 음반업계에서 ‘2분 마다 1장씩 팔리는 음반’으로 통했다.

1970년대의 서울시민회관은 그의 전용 무대이다시피 했다. 김추자 박인수 임아영 김정미 장현 등 독특한 음색의 가수들이 펼치던 소울 음악은 못 보던 광기와 열정의 세계를 펼쳐 보였다.

8, 90년대 히트했던 ‘아름다운 강산’(1972년)과 가장 한국적인 5음계와 각설이 장단으로 구성된 ‘미인’(1974년)이 바로 이 시기의 작품이다. 그의 인기에 견줄 자 없었다.


정권은 날 내버려두지 않았다

“청와대에서 전화가 한통 걸려 왔어요. ‘각하의 찬가를 만들라’고 말이죠.” 그러잫아도 록음악을 퇴폐로 몰아 숨통을 죄던 박정희 정권이 못마땅하던 차였다.

“못 쓴다고 했죠. 내가 너무 독단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나 봐요.” 문공부는 1975년 ‘가요 정화’라는 명목으로 그의 히트곡들을 모두 금지곡에 묶어 방송과 공연 등을 금지시켰다. ‘퇴폐를 조장한다’ ‘너무 시끄럽다’ 는 것이 이유였다.

그렇잖아도 그는 당시 정권의 눈엣가시였다. 미국 활동 시절 자연스레 접했던 두 가지, 장발과 대마초 때문이었다. 최초의 장발 가수라 해서 그렇잖아도 당국에 찍혀 있던 그는 드디어 1975년말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게 된다.

미군내 히피들이 ‘해피 스모크’라며 권했던 마리화나를 집안에 그대로 방치해 뒀다 수사기관의 첩보망에 걸려든 것. 인기 절정의 순간에 맞닦뜨린 낭패였다. 3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고는 가산을 처분하고 기타도 팽개치고 낚시터에 눌러 앉아 세월을 낚았다.

그가 잠수해 있는 동안 가요판은 디스코 등 댄스 뮤직 일변도로 치닫고 있었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만든 관제 행사 ‘국풍’ 당시, 그는 10년전의 ‘아름다운 강산’을 댄스 뮤직풍으로 개작해 무데에의 아쉬움을 어설프게나마 달래갔다.

그러나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을 본연의 정신으로 하는 록 음악의 대부는 “군인들이 만들어 놓은 컨셉이 아니라 자꾸만 엉뚱환 데로 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방랑의 길을 택했다. 이남이 서일구와 만든 3인조 록 밴드 ‘세 나그네’는 전국을 돌아 다니며 록의 정신을 외쳤다. 겉으로는 돈벌기 위해 유랑하는 초라한 행색의 밴드였으나, 그는 “내가 그냥 좋아서 돌아 다녔다”고 한다.

당시 ‘길’ ‘떠나는 사나이’ 등을 수록, 발표했던 화제의 앨범 ‘바다ㆍ내(川)’는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자의 자유를 강렬한 록으로 말하고 있다.

. 1999년 12월 29일 그가 시나위, 윤도현밴드 등 쟁쟁한 후배와 함께 가졌던 콘서트 ‘너희 록을 아느냐?’는 세기말을 화려하게 전송했다. 구정이던 지난 2월 12일 세종문화회관 만원 사례를 빚었던 콘서트는 5월께 실황 음반으로 나온다.


하나의 음으로 빚어낼 새로운 음악 준비

2001년 2월 개설한 자신의 웹 사이트(www.sjhmvd.com)에는 그의 과거와 현재가 수록돼 있다. 현재 마스터 작업중인 그의 작업 1차분은 5월초부터 우드스탁에서 취입 완료, 6월부터 ‘신중현 M&C’ 레이블을 달고 사람들과 만난다. 힙합, 랩, 발라드의 거센 물결을 헤집고 진정한 한국적 록의 르네상스를 위해.

록 드러머 출신인 부인 명정강(61) 사이에 그룹 ‘시나위’ 리더인 대철(37), 영화음악가 윤철(35), 로커 석철(33) 등 아들을 두고 있는 그는 그야말로 완벽한 록 패밀리의 수장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악기 세트를 장난감으로 알고 살아 온 아들들에게서, 진정한 한국적 록의 꿈은 고스란히 계승돼 새로운 처소를 틀 것이다.

“억울한 시기를 거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가 존재했겠어요? 그걸 이겨내는 데는 노장사상이 큰힘이었죠”. 암울하던 시기, 노자의 도덕경을 외고 욌다. ‘부드러움이 굳셈을 이김, 무른 게 센 걸 이김’.

여기까지 다다른 그가 향후 진정으로 추구할 음악이 어떤 모양이 될 지는 자신도 단언할 수 없다. 화성(하모니)을 추구하는 서양식의 음악이 아니라, 하나의 음을 갖고 끝까지 들어가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음악이 올해 안으로는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지워 질 것이라 한다.

장병욱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2/05/03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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