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골매, 최다승 금자탑으로 날다

한화 송진우 통산 147승 대기록 세우며 선동열 벽 넘어

송진우는 23일 청주구장에서 열린 SK와의 홈경기에서 9이닝동안 완투하며 9 피안타, 8탈삼진, 3실점(2자책점)으로 승리투수가 됐다.

89년 4월12일 대전에서 열린 롯데와의 데뷔전에서 완봉승을 거둔 이후 13년 11일만에 통산 147승째를 거두며 최다승 투수가 된 것. 고향 청주 팬들 앞에서 올린 승리라 의미는 더욱 값졌고 구단 역시 147발의 축포를 쏘아올리며 대기록을 축하했다.

송진우는 세광고_동국대_빙그레를 거치면서 팀을 대표하는 엘리트 선수였지만 마운드에 서는 것만으로 타자들을 압도했던 현역 시절의 선동열과는 기록면에서 비교하기는 어렵다.

11시즌 동안 146승을 올린 선동열은 40패만 당하며 통산 7할8푼4리라는 기록적인 승률을 올린 반면에 14시즌만에 147승째에 도달한 송진우는 승수만큼이나 패수(107패)도 많은 투수이기 때문이다.

송진우도 기록 달성 직후 “선동열 선배의 기록을 내가 깰 줄 예상도 못했다”고 겸손해 했지만 천재 선동열의 기록이 위대한 것만큼이나 우보(牛步)걸음으로 기록을 경신한 노력파 송진우의 기록역시 그만큼 더 값지다.


노력으로 일궈낸 한국대표 좌완투수

충북 증평에서 송병영씨(77ㆍ농업)의 2남4녀중 막내 아들로 태어난 송진우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운동신경을 자랑하긴했지만 야구선수의 꿈은 꾸지 않았었다. 차범근의 플레이를 보며 오히려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고, 집안 사정상 운동선수가 되기에 여의치가 않았다.

3살 위의 막내누님(송경자ㆍ온양중 배드민턴 코치)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배드민턴 선수로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하지만 막 야구단을 창단한 교장선생님의 끈질긴 권유를 끝내 이기지 못했다. 일단 야구를 시작한 송진우는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초등학교 시절 손이 귀에 닿은 와인드업 동작 때문에 몸에 무리가 가 선수생활을 오래 못할 것이라는 지적이 있자 머리에 30㎝짜리 철사관(冠)을 만들어 쓰고 연습을 했을 정도다. 결국 변칙적인 투구폼은 고치지 못했지만 훈련량을 늘리며 약점을 극복했다.

청주 세광고 시절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스타로 성장한 송진우는 동국대를 거쳐 89년 빙그레(한화의 전신)에 입단하며 일약 한국을 대표하는 좌완투수로 성장했다. 직구 구속은 145㎞안팎으로 강속구투수는 아니었지만 날카로운 슬라이더와 제구력으로 팀의 에이스 노릇을 했다.

91년 10월12일 해태와의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8회2사까지 퍼펙트 경기를 한 것, 91년 제1회 한일 슈퍼게임 5차전에서 6이닝 무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된 것. 92년 19승(8구원승) 17세이브로 다승왕겸 구원왕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것 등 당시 송진우는 전성기에 있었다.

구대성과 함께 한화의 마무리와 선발을 오가며 팀을 이끌어오던 송진우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97년 제구력이 떨어지자 주무기 직구와 슬라이더가 난타당하기 시작했다. 97년 6승(12패) 98년에도 6승(10패)로, 송진우의 표현을 빌자면 ‘타자들이 공의 실밥을 보고 쳤을’ 정도로 처참했다.

위기를 극복한 것은 집중력 밖에 없었다. 98년 미국 전지훈련에서 미국 코치들의 투구 방법을 보고 해답을 찾았다. 연습 투구 때 잘 듣는 공으로만 연습을 하는 다른 투수들과 달리 경기전 30개의 공을 던지더라도 반드시 타자가 있는 것으로 가상, 코너워크를 하며 시뮬레이션 피칭을 했고, 포크볼과 역회전 체인지업을 개발했다.

다음해인 99년 3년만에 15승(5패)째를 거두었고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4번이나 준우승에 머물렀던 한을 풀었다.


강한 승부근성과 창조적인 플레이

2000년 1월 큰 사회적 파장을 몰고온 선수협이 출범했을 때 회장으로 송진우가 추대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놀랐던 것처럼 송진우는 조용하고 차분한 성품이지만 경기장에 서면 냉정한 승부사가 된다.

우리나이로 37세(실제로는 38세)지만 아직도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결정타를 맞으면 밤새 잠을 못이룰 정도다. 생각하는 야구도 송진우의 오늘을 이뤘다. 송진우는 번트수비에 관해서만은 현역 투수중 최고인데 이는 송진우 본인만의 노하우에서 나왔다.

동국대 시절 김인식(현 두산)감독의 지도아래 번트 수비능력을 키웠으나 맨손으로 공을 잡아서 1루주자를 2루에서 잡아내거나 다른 투수들과 다른 스텝과 회전으로 번트타구를 처리하는 솜씨는 코칭스태프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송진우 본인의 고집으로 된 것이다.

이광환 한화 감독역시 “송진우는 생각하며 야구를 한다”고 칭찬한 것처럼 체구(181㎝ 75㎏)도 작고 공도 위협적이지 않은 송진우가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창조력과 강한 승부근성에서 나왔다.

최다승 기록을 세운 날 송진우는 “이제 200승을 하고 싶다”고 했다. 강한 힘으로 타자들을 압도할 수 있는 나이는 이미 지났지만 관록투로 전인미답의 고지를 밟고 싶다고 한 것. 송진우는 “내가 그 길을 밟는다면 후배들에게 또 하나 목표가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선수협 시절 선수생명을 걸고 누구도 꺼리는 회장을 2번씩이나 한 것, 사재 1,000만원을 털어 사무실을 마련에 힘쓴 것 등 송진우는 정상의 자리에서도 늘 뒤따를 후배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홈런을 맞아도 안타를 맞아도 좋다. 40대까지 마운드에 서 공을 뿌려대는 ‘회장님’ 송진우의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은 기자만의 소망은 아닐 것이다.

이왕구기자

입력시간 2002/05/03 15:26


이왕구 fab4@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