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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세상] 책임을 질 줄 아는 방송

[라디오 세상] 책임을 질 줄 아는 방송

올 봄 우리는 황사를 뒤집어쓴 대지처럼 불투명한 언론의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언론의 공공성과 언론 자유를 놓고 항간에 뜨거운 공방이 난무했고 이를 계기로 언론에 종사하지 않은 사람들도 신문과 방송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신문과 방송. 같은 언론 매체이지만 전달의 방법 이외에 역할에 있어서도 두 매체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자사(自社)의 자본으로 자사의 언론관에 따라 기사를 쓰고 논조를 펴는 신문과 달리 방송은 한정된 국민의 재산인 전파를 사용하는 매체이기에 공공성을 보도의 최우선 정책으로 견지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종교 방송 등 특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설립된 방송도 마찬가지이다. 종교 방송의 목적 수행에 앞서 기본적으로 국민의 재산인 전파를 임대해서 사용하는 공공의 책임을 지어야 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국민의 판단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치적 사안 등을 놓고 방송사가 주관적 견해를 펴서는 안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기에 신문의 논설위원을 방송에서는 해설위원이라고 하고, 방송에서 논평 프로그램은 있어도 사설 프로그램은 편성 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일부 외국에서는 사설 프로그램이 존재하지만 그 타당성 문제는 학계의 뜨거운 논란의 요소로 남아 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방송에서의 사실성과 공공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1997년 노동법 파동으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노동법 개정의 타당성을 얘기하면서 우리의 노동법은 43년 동안 한번도 개정을 한 적이 없는 구법이므로 개정은 불가피 할 수밖에 없다면서 노동법 개정의 당위성을 강하게 피력했다.

물론 그 당시 노동법 개정은 당연한 시대상황이며 단지 절차상으로만 문제가 될 뿐이라는 의견도 많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97년 기습적인 노동법 개정 그 자체가 아니라 방송을 통해서 국민에게 전달된 대통령의 사실성이다.

우리 노동법은 53년에 제정된 이후 88년까지 무려 8차례나 대폭적인 개정을 했다. 그러나 당시 이 엄연한 사실은 대통령의 말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일부 학자들이 이를 지적했으나 방송에서는 사실보다는 대통령의 심기관리에 더 많은 역점을 두고 뉴스시간마다 되풀이하여 대통령의 견해를 방송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호주의 ABC방송에 대한 그 나라 국민들의 전폭적인 신뢰감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ABC방송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감의 배경은 역설적으로 약 30년 전에 있었던 한 방송사고로부터 비롯된다.

어느 날 방송에서 ‘물가 정보’ 원고를 읽던 아나운서가 감자 값을 읽으면서 그 가격을 10배로 부풀려 잘못 읽은 사고가 발생했다. 예를 들어 1,000원이라고 해야 할 것을 숫자의 단위를 잘못 읽어 10배인 1만원으로 잘못 읽은 것이다.

그런데 이 방송을 호주의 서부의 끝이라 할 포트해들랜드 근교에 사는 한 농부가 듣고 엄청난 물량의 감자를 전세비행기에 싣고 대양주를 가로질러 서남부의 끝에 위치한 캔버라로 온 것이다.

ABC방송은 긴급 회의를 열어 그 농부가 비행기로 공수해온 그 엄청난 양의 감자 전체를 10배의 가격으로 흔쾌히 사들였을 뿐만 아니라 ABC 방송의 내용을 믿어준 데 대한 고마움을 깊이 전달하였다. 방송의 공공성과 신뢰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사실 우리의 방송에서 반론권이나 정정 보도권 등이 사문화 된 매스컴의 용어가 아니라 우리 삶에 밀착된 단어라는 것이 알려진 것도 불과 몇 년 전의 일임을 생각할 때 ABC 방송의 감자 값 오보 사건은 우리 방송의 현주소와 신뢰성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오늘 우리가 건너가는 이 정치의 계절, 또 어떤 사안을 놓고 언론의 자유와 공공성에 대해 뜨거운 공방이 벌어질지 앞일을 예측할 수는 없다. 이런 시점에서 실핏줄까지 헤아릴 수 있을 만큼의 투명한 방송과 여기에 등을 기대는 국민의 신뢰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조원석 KBS라디오 편성주간

입력시간 2002/05/03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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