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당권·대권 분리체제 첫 실험
민주당 대통령 후보 노무현 후보와 당 대표 최고위원 한화갑 대표의 쌍두 체제, 노-한 체제가 출범했다. 제도적으로 대권과 당권이 분리된 상태에서 6월 지방선거와 12월 대선을 치르게 되기 때문에 노-한 관계의 전개 양상은 민주당의 선거 결과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노-한 관계가 주목을 받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한 대표, 후보중심 당운영 천명
노-한 두 사람은 일단은 보기 좋은 출발을 보이고 있다. 한 대표는 4월 27일 전당대회 최고위원 경선에서 최다 득표로 당권을 거머쥔 뒤 소감 연설에서 “노 후보를 앞장세워 정권재창출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며 노 후보 관련 발언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 당 대선후보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를 갖췄다.
한 대표의 노 후보 세우기는 4월 28일 노 후보와 최고위원단이 상견례를 하는 자리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민주당사 3층 회의실에서 이루어진 상견례에서 노 후보와 한 대표는 나란히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한 대표는 이 자리에서 “당 기구 구성을 빠른 시일 내에 할 것이고 지방선거 준비에 착수할 것이며 선거체제로 전환해 후보 중심으로 당의 에너지를 투입하는 방향으로 운영하겠다”며 후보중심 당 운영 방침을 밝혔다.
한 대표는 이어 노 후보에게 “모든 것이 당의 선거 승리를 위해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면서”선거 주역인 후보가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야 한다”고 적극 참석을 권유했다.
노 후보는 이에 대해 “경선은 개혁의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라며 “최고위원 선거 중에 당력이 후보에 집중됐는데도 불평 안하고 후보 중심으로 마음을 모아준 데 대해 최고위원 들에게 감사한다”고 화답했다.
이낙연 대변인의 전언에 따르면 상견례를 마친 뒤 국립묘지를 참배하러 가는 버스 안에서 노 후보와 한 대표가 한 자리에 나란히 앉아 서로 귀엣말을 하며 웃음꽃을 피우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상큼한 출발, 긴장 요인도 산재
이처럼 노-한 두 사람의 관계가 상쾌한 출발을 보이고는 있으나 민주당내의 역학관계로만 보면 이 관계는 언제든 긴장과 갈등의 관계로 빠질 요소를 갖고 있다. 1월 개정된 당헌ㆍ당규에 따르면 대권과 당권은 엄격하게 분리돼 있어 노 후보는 기본적으로 당무에 개입할 수 없도록 돼 있다.
그러나 노 후보는 지방선거 등 전국단위의 선거를 치름에 있어 한 대표가 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데 협의를 해주도록 요청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한 대표가 선거대책위원장 등을 임명할 때 노 후보와 협의를 하도록 당헌ㆍ당규에 명시돼 있다.
역으로 노 후보는 대통령 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데 있어 최고위원 회의와 협의하도록 돼 있다. 전국단위의 선거에 관한 한 노-한 두 사람의 협력관계는 승리를 위한 결정적인 요소인 것이다.
이런 제도적인 측면과 관련해서도 두 사람의 협력관계가 원만하게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개혁과 합리성을 지향하는 노-한 두 정치인의 성향상, 당내 지지기반이 대부분 겹치기 때문에 사람을 쓰는 데 있어서도 그렇게 충돌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 이유다.
노 후보는 서울지역 경선 전에 지구당을 순방하는 자리에서 “예전에 대선후보는 당 공조직을 움직이고 사조직도 운영했는데 나는 아니다”며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네트워크 관계로 가는 새로운 실험을 할 것”이라고 밝혔었다. 대선후보라고 해서 당 위에 군림하지 않고 당과 보조를 맞춰 함께 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한 대표도 물론 여기에 화답, “후보에게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올해는 모든 행사가 후보 중심인 만큼 당이 후보를 적극 지원하겠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노 후보측으로서는 한 대표가 굳건한 당내 기반을 바탕으로 조직력이 취약한 노 후보의 약점을 보완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듯 하다.
노 후보, 당내 등거리 전략 구사
그러나 대권, 당권 분리체제의 도입은 집권당 사상 초유의 일이어서 언제든 예기치 않은 갈등 등 시행착오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점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노 후보 스스로도“당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있을 것”이라며 “갈등 없이 변화할 수는 없으며 당도 변화해야 할 것”이라고 말해 양자간 관계가 반드시 순탄치 만은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노 후보 진영의 한 관계자는 “한 대표의 든든한 당내 기반이 자칫하면 후보와 대표간 세력 경쟁 또는 영역 다툼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신경이 쓰인다”고 말하기도 했다.
4월 29일 첫 소집된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는 앞으로 민주당이 갈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점이 일부 현실로 나타났다. 한 대표는 2명의 지명직 최고위원에 김중권 전 상임고문과 김원길 의원을 임명하려 했으나 정균환 이협 김태랑 최고위원의 반대에 부딪혀 결정을 유보했다. 이는 단일성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되는 최고위원회의가 반드시 한 목소리만을 내면서 굴러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게 해 준다.
이와 맞물려 노 후보가 한 대표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원칙적으로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한 것도 미묘한 대목이다. 노 후보측은 공식적으로는 대권, 당권 분리의 원칙을 충실히 하기 위해 대선후보가 최고위원 회의에 참석하지 않을 방침임을 천명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앞으로 분란의 장이 될 지도 모르는 최고위원 회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겠다는 계산도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또 노 후보로서는 한 대표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일단 좋다고 판단되지만 당내 세력갈등에 휘말려 불가피하게 어느 한 쪽을 지원하는 모양새를 취하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다.
이와 함께 노 후보가 정계개편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당의 주류와 다시 긴장관에 빠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노 후보는 정계개편 구상과 관련, 민주당 중심이라는 표현을 자제할 만큼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으나 대부분의 주류 세력은 민주당이 확고한 중심이 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한 원칙으로 설정하고 있다.
입력시간 2002/05/03 21:09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