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서초동 꽃동네

‘철에 따라 아무데고 지천으로 피던 들꽃들은 다들 천덕스런 제 이름 보다 진저리치게 고왔다/ 쇠귀나물, 좁쌀풀 떡, 쑥, 개쑥갓, 갈키나물…/ 하다 못해 뉘담밑 수영 들나물까지도 가던 발길을 불러 세웠고, 죄다 뜻있는 풀들이었다/ 내 이젠 계절도 까 먹은 동네에 와 이리저리 신역만 고되게 떠든다’

시인 김상목(金相睦)의 ‘홍경이 마을’ 이라는 시다. 풀새기, 서리풀 또는 상초리(霜草里)라 불리던 서초동도 옛날에는 김상목의 시 속에 그려지는 ‘홍경이 마을’ 같았을까. 아침 길을 걷노라면 바지가 흠뻑 이슬에 다 젖을 정도로 풀이 하도 무성해 ‘풀새기’, ‘서리 풀이’라 불렀으며 이를 한자로 뜻 빌림한 것이 상초(霜草)리, 또는 서초(壻草)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草)의 옛날은 ‘불’이다. 상추를 일러, 지금도 경상도와 강원도의 일부지방에서는 ‘부루’, ‘부리’라 하는데 말뿌리 ‘불-‘은 풀의 고어다. ‘잎새, 이파리’의 ‘새, 파리’는 고어에서 풀의 뜻을 지닌다. ‘파리’의 말뿌리를 ‘팔-‘로서 ‘풀’과 어원이 같은데 모음 변화의 차이 일 뿐이다.

일본어 하(ha:葉)의 옛말 발(pal)은 우리말 ‘풀’의 고어 ‘불’과 말뿌리가 같다. 낙엽을 흔히들 ‘갈비’라고 하는데 ‘갈-‘은 나무의 옛말이고, ‘비’는 불(草)과 말뿌리가 같은 것이다. 품(花 )이 가끔 문헌에 보이는데 ‘품’은 꽃의 뜻을 지닌 말이다. 이것은 풀과 말뿌리가 같다고 하겠다. 사실 꽃과 풀에 차이를 두기는 어렵다.

옛날에는 꽃(花)이 풀의 뜻도 있었다고 여겨진다. 사실 된소리 발음인 ‘꽃’의 이전 말은 15세기경엔 곳(花)이다. ‘풀’을 ‘꼴’이라고도 하는데, 조어형은 ‘골>곧’이다. ‘곶’과 말뿌리가 같다.

꽃의 계절이다. 소동파 아니라도 꽃잎 하나 지면 오는 듯 가는 봄이 그만큼 아쉬워 진다. 올해는 유난히 황사 바람 속에서도 진달래, 개나리, 벚꽃이 흐트러지게 피었다가 이미 졌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마는 ‘마음 심(心)자가 세 개 모여 ‘꽃술 예(蘂)자라 했던가.

수꽃술 암꽃술을 한데 그리기가 이러하던가. 꽃꽃이 절절이 무리 지어 핀 것도 그와 비슷하다. 풀이 우거진 모습도 멀리서 보면 ‘나무목(木)자 다섯. ‘삼림(森林)’이 바로 그것이다. 그 숲속에 몇 떨기 몇 줄기씩 꽃과 풀이 잘 조화를 미뤄, 수(繡)놓고있다.

‘서초(瑞草:상스러운 풀)’라는 땅이름에 걸맞게 화훼단지가 들어서 있으니 ‘서초’하면 꽃동네요, ’꽃동네’하면 서초의 브랜드가 되었으니 서초(瑞草:서리풀, 풀새기)라는 땅이름 탓일까.

이홍환 현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입력시간 2002/05/09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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