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 세계를 놀라게 할 비책 있다

히딩크의 대도박 월드컵 16강, 한국축구 새 이정표 만든다

거스 히딩크 감독(56)의 ‘도박’이 시작됐다.

히딩크는 한국 대표팀을 월드컵 16강에 올려놓으면 판돈 100만 달러(한화 약 13억 원)를 싹쓸이한다. 반대로 내기에서 지면 명예를 내놓아야 한다. 그 동안 국제 무대에서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는 것은 물론, 대한민국 ‘공공의 적’으로 지탄 받을 것이 뻔하다.

하멜이 제주도로 표류한 지 350년이 흘러 다시 한국과 인연을 맺은 네덜란드인 히딩크는 월 1억 원씩 1년 6개월간 총 18억 원을 기본으로 챙기고 있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겠다”는 그의 장담이 들어맞는다면 보너스가 100만 달러. 과연 히딩크는 돈과 명예를 모두 거머쥘 수 있을까. 한국 축구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할 그의 ‘16강 비책’은 무엇일까.


핵심은 힘…머슴이 황태자다

16강을 위해 히딩크 감독이 가장 강조하는 것이 체력과 기동력이다. 한 마디로 기술이 딸리니 몸으로 때우겠다는 것이다.

우리 수준이 선진 축구와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현실에서 누구나 공감하는 대목이다. 아무리 명장이더라도 한국을 1년 6개월 만에 프랑스나 잉글랜드 같은 수준으로 올려놓을 수는 없는 법. 게다가 펠레나 마라도나 같은 축구 천재가 월드컵을 앞두고 어느 날 갑자기 무더기로 하늘에서 떨어질 리도 만무하니….

히딩크 감독은 4년 전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4강에 올려놓았다. 내로라 하는 선수들이 모인 네덜란드 대표팀도 후반 막판까지 그들의 체력을 유지시켜준 ‘파워 프로그램’이 없었다면 그렇게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으리라는 것이 그의 자랑이다.

전술도 체력을 바탕으로 한다. 월드컵 본선에서 3-4-3이나 3-5-2 포메이션을 혼용하겠지만 전술의 핵심은 역시 ‘힘’이다. 서구 선수들과 몸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파워, 전ㆍ후반 90분 내내 그라운드를 줄기차게 뛰어다닐 수 있는 지구력 등을 선수들에게 요구한다.

막판 상대의 집중력이 저하될 때 강인한 체력으로 밀어붙이겠다는 의미다. 선수들에 대한 평가 기준도 예외가 없다. 힘 좋은 김남일 송종국 이영표 박지성 유상철 등은 일찌감치 감독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반면 안정환 윤정환 등 대표적인 테크니션들은 엔트리 발표 순간까지 불안에 떨어야 했다.


베일 속에 감춰진 세트플레이

강팀을 상대로 어떻게 골을 넣을까. 가장 확실한 찬스가 프리킥 코너킥 등 세트 플레이를 통해서다. 선수들끼리의 약속과 반복 훈련에 의해 득점력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물론 상대가 미리 알아채지 못하게 해야 한다.

4월 말 파주 트레이닝 센터에서 해프닝이 있었다. 히딩크 감독은 프리킥이나 코너킥 시 패턴 플레이를 훈련하기 위해 훈련장 비공개를 선언했다. 하지만 전쟁터에 나선 듯한 취재진이 철망 너머에서 지켜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는 일.두 차례의 비공개 훈련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묘안을 짜냈다.

대외적으로는 물론 선수들에게까지 휴식 시간으로 공고했던 어느 날 오전, 갑자기 훈련 지시를 내렸다. 어리둥절한 선수들은 그라운드로 집결했고 곧 프리킥 연습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마저 우연히 파주를 찾은 기자들에게 들켜버렸고 그 순간 훈련은 곧바로 중지됐다.

비공개 훈련이든 비밀 훈련이든 세트 플레이 패턴 연습은 대회 개막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세계적인 프리키커 데이비드 베컴(잉글랜드)이나 호베르투 카를로스(브라질), 루이스 피구(포르투갈)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단거리에서는 안정환 윤정환 이천수, 장거리에서는 최용수 송종국 유상철 등의 한 방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직접 슈팅이 힘든 상황에서는 어떤 패턴으로 골문을 공략하는 지 주의 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세트 플레이 훈련. 16강을 일구기 위한 가장 확실한 득점 루트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베일 속이다.


얻을것 많은 세계 최강팀과의 평가전

히딩크 감독은 이미 한국 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지난해 5월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프랑스에 5-0으로 졌고 8월에는 체코에 역시 5-0으로 졌다. 그 결과 한 동안 ‘오대영’이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예방주사를 세게 맞은 셈 쳤다.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5월 한 달 동안도 3차례 홍역을 치러야 한다. 유럽 강호 스코틀랜드(16일 부산) 잉글랜드(21일 서귀포) 프랑스(26일 수원)와 평가전을 앞두고 있다. 히딩크는 “개최국의 메리트가 이런 것이다. 세계적인 팀들과 경기를 갖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냐”며 오히려 즐기는 듯한 표정이다.

사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진짜 승부는 월드컵 본선 D조의 폴란드(6월 4일 부산) 미국(6월 10일 대구) 포르투갈(6월 14일 인천)과 벌인다. 5월 평가전 시리즈는 스코어보다는 선수들의 자신감 키우기가 목적이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멤버들은 당시 마라도나(아르헨티나)의 이름만 들어도 다리에 힘이 쏙 빠졌다고 한다.

예전처럼 정면 승부를 벌이기도 전에 주눅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 면역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강호와의 격돌은 많을수록 좋다. 선수들의 자신감과 국민들의 성원. 전술적인 16강 비책을 마련하고 있는 히딩크 감독의 든든한 ‘빽’이다.

최승진 일간스포츠 체육부 기자

입력시간 2002/05/10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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