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이 의혹의 중심?

벤처커넥션, 16대 총선 정치자금 창구 등 불거지는 비리 연루설

국정원이 위기에 몰렸다. 국정원이 16대 총선 직전 여권 고위인사의 요청으로 거액을 모아 전달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의혹의 핵심은 국정원이 여당의 정치자금 창구였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자금 창구 역할에 대한 진위여부를 차지하더라도 국정원이 여권의 요청으로 벤처 기업가를 상대로 모금을 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격을 준다.

과거에도 권력기관이 기업체를 상대로 모금을 한 사례가 종종 있다. 전두환 ㆍ노태우 비자금 사건 수사 당시 국세청장이 선거자금을 모금해 사법처리됐고, 문민정부 시절에도 세풍 사건과 안기부 예산전용사건 등으로 과거의 구태가 다시 재연됐다. 과연 세풍사건 등을 단죄했던 국민의 정부에서도 비밀스럽고 위험한 ‘정치도박’이 발생한 것일까.


정성홍 전 국정원 과장의 폭탄진술

의혹은 정성홍 전 국정원 과장이 진승현 게이트로 구속된 뒤 검찰에서 한 진술이 보도되면서 폭발했다. 정 전과장은 검찰에서 “엄익준(사망) 차장의 지시로 총선 직전 진승현씨에게 돈을 모금했다. 나와 엄 차장은 창구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국내정치를 주무르던 국정원 2차장과 경제과장 출신의 직속부하가 ‘창구’에 불과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었을 뜻하는 것일까.

정 씨의 검찰 진술을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해보면 의미는 보다 명확해 진다. 정씨는 문민정권에서도 상당한 총애를 받은 국정원 엘리트였던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현정권 들어선 호남 출신이면서도 ‘문민정권’ 사람으로 분류돼 한동안 ‘물’을 먹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를 구해준 것은 엄익준 2차장이었다. 2000년 1월 제주지부에 근무하던 정씨는 엄 차장의 추천으로 일약 대공정책실 경제팀장으로 발탁된다. 두 달뒤인 3월 엄 차장은 은밀히 사무실로 불러 비밀지시를 했다. “이번에 국가를 위해서 중요한 특수사업을 해야 한다. 너무나 중요하고 극도의 보안이 생명이기 때문에 자네 정도의 사람이 적격자라고 판단돼 이 사업을 자네에게 맡기기로 하였네.”

엄차장은 이어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많은 경비가 필요하나, 이 돈을 공식적인 국가예산만으로 처리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사업이고, 지금 당장 시행되어야 할 사업으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며 “진승현이라는 사업가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엄 차장의 지시를 받은 정씨는 개인적으로 알고있던 일본인 2세 사업가에게 “진승현이라는 사업가와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고, 4월 6일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진승현을 만났다. 우연을 가장한 접근이었다. 정씨는 검찰에서 “ ‘어린애(진승현)’를 상대로 특수사업 설명을 할 수 없어 ‘국가를 위해 돈을 쓸 용의가 있느냐’ 고 물었더니 진씨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과정에서 형ㆍ동생 하기로까지 했다”고 진술했다. 이른바 진승현 게이트의 서막이었다.

진씨는 며칠 뒤 암 투병으로 입원 중이었던 엄차장에게 진승현건을 보고했고, 엄차장은 “특수사업 비용이 필요한 모 인사가 너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했다”며 자신의 대리인으로 정씨를 내세웠다. 이후 총선을 불과 2일 앞둔 4월11일 무렵 실제 ‘돈 요청’이 왔다.

그러나 당시는 진씨가 해외출장중이어서 전달하지 못했고, 총선 직후인 4월 18,19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K마트 주차장에서 2차례에 걸쳐 2억원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당시 돈을 요청했던 측에선 “액수가 훨씬 큰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 사업이 낭패를 볼 수 있다. 빨리 마련하라”고 추가 자금 지원 요청을 했다고 정씨는 밝히고 있으나 검찰 조사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정씨가 “기밀 사항이기 때문에 요청한 인사가 누구인지 사업내용이 무엇인지를 밝힐 수 없다”고 버텼기 때문이다. 정씨도 사안의 민감성을 의식한 듯 “총선자금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국정원측의 아리송한 해명

국정원 측은 이 보도가 나간 뒤 “검찰에 구속된 김은성 전 차장(엄익준 차장의 후임자)을 보호하기 위해 정씨 등이 이미 사망한 엄 전 차장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고 있다”면서 “진씨에게 받은 돈은 김은성-정성홍이 모두 개인적으로 사용했다”는 입장을 보였다.

특히 국정원은 “엄 차장은 2월 암진단을 받은 이후 업무에서 손을 뗐다”며 정씨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러나 엄 차장은 투병 당시에도 업무를 수행해 사망 뒤 ‘죽는 날까지 일을 한 공직자의 귀감’으로까지 보도될 정도로 병상에서도 국정원의 업무에 관여했다.

또 진씨에게 돈을 받아 가로챈 뒤 ‘소설을 쓰고 있다’는 국정원 측의 해명도 정씨가 당시의 정황을 상세히 진술하고 있고 진승현씨도 이를 시인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커지는 국정원의 벤처커넥션 의혹

사정 당국의 한 관계자는 각종 게이트 수사로 정국이 끊던 올해 초, “이제 시작이다. 국정원을 주목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이 관계자는 “국민의 정부 초기 벤처육성정책을 기획, 집행한 곳이 국정원”이라며 “앞으로 벤처 비리가 계속 터져 나오고 국정원도 곤혹스런 입장에 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의 전망은 그리 어긋나지 않았다. 정성홍씨의 검찰 진술에서도 읽혀지듯 진승현 게이트는 한 벤처기업가의 단순한 구명로비 스캔들이 아니라 선거자금 조성을 위한 국가기관의 조직적 개입ㆍ비호 사건일 가능성이 짙어지고 있다.

또 정현준ㆍ이용호ㆍ윤태식 게이트 등 각종 벤처비리 사건도 여권을 위해 국정원이 ‘통치자금’ 또는 정치자금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비리사건이라는 시각도 있고 실제 이런 단서들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스마트디스플레이(SD) 등 벤처기금 비리사건에도 국정원이 깊숙이 연루된 것이 검찰수사로 확인된 상태다. 국정원 4급 직원이었던 김규현씨는 SD 등 벤처업체로부터 50억원대의 주식뇌물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고 윤태식씨와 국정원의 유착의혹도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주목할 만한 점은 각종 게이트 사건에서 드러나듯 벤처 기업인들이 국정원과 유착된 시기는 대부분 1999년 말~2000년 상반기로 벤처열풍과 함께 총선이 치러진 시기와 맞물린다.

과연 국정원이 여권의 정치자금 창구역할을 했을까? 열쇠는 이미 검찰의 손에 쥐어져 있다. “외부의 요청으로 특수사업 명목으로 돈을 모금했다”는 정성홍씨의 명백한 진술이 있기 때문이다.

정가에선 국정원이 비밀스럽게 모금할 특수사업이라면 선거자금과 대북자금 밖에 없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어느쪽이든 메가톤급 위력을 가진 사안들이다.

정씨의 검찰 진술을 사실로 가정한다면 과연 국정원 최고위층에게 자금 동원 요청을 한 여권 인사를 밝히면 이 같은 의문도 자연스럽게 풀릴 수 있을 전망이다. 검찰은 지금 진승현ㆍ이용호ㆍ최규선 게이트를 한 묶음으로 조사중이다.

그러나 검찰이 과연 ‘국정원 미스터리’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내놓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여권과 국정원이 얽히고 설킨 권력 심장부의 비사(秘史)에 칼을 대는 것은 대통령의 두아들 처리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검찰로서는 또다른 측면에서의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태희 사회부 기자

입력시간 2002/05/10 15:54


이태희 사회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