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밀리언달러 호텔

그날밤 호텔에선 무슨일이 있었나

빔 벤더스는 현대 독일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독일의 전후 세대를 대변하는 뉴 저먼 시네마의 기수로서의 명성은 동시대 감독인 베르너 헤어조그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와는 또 다른 방향으로 지속성을 유지하고 있다.

벤더스 영화의 내외향적 특징으로는 미국 대중 문화에 매혹되었던 성장 배경의 반영, 여행을 통한 실존과 고독에 대한 물음, 할리우드의 장르와 스타일을 나름대로 차용하고 변형시킨 화려한 스타일을 꼽을 수 있다.

현대 영화사의 중요한 감독이지만 국내에는 칸 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파리, 텍사스>(1984년) 이후의 작품들만 소개되었다.

현대 가족의 해체와 결합을 그린 이 쓸쓸한 영화는 빼어난 영상과 음악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겨 많은 이들이 '내 인생의 영화'로 꼽고 있다. 유한한 인간의 삶을 동경하는 천사가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 <베를린의 천사의 시>는 니콜라스 케이지와 맥라이언 주연의 <시티 엔절>로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세기말을 배경으로 한 <세상 끝까지>, 이탈리아의 거장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를 도와 완성한 <구름 저편에>, 국내에 쿠바 음악 선풍을 불러 일으킨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이 벤더스의 국내 소개작이다.

<밀리언 달러 호텔 The Million Dollar Hotel>(18세, 맥스비전)은 2000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았고, 5회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시 감독이 방한하기도 했다.

멜깁슨, 밀라 요보비치와 같은 유명 스타가 출연했음에도 극장개봉을 못하고 비디오로 직행한 것은 어두운 이야기와 디지털 실험작이라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선입견에 지나지 않는다.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도 아니고 벤더스의 영화가 대개 그러하듯 영상이 빼어나며 인기 록 밴드 U2의 보컬리스트 보노가 음악을 맡는 등 대중성이 전혀 없다고 말하기 어려운 영화이어서 극장 미공개가 의아할 따름이다.

가까운 미래의 LA 중심가. 50년대만 해도 일급 호텔이었던 밀리언 달러는 화려한 이름과는 달리 낡을 대로 낡아 밑바닥 인생들의 숙소로 쓰이고 있다. 어느 날 이 호텔 옥상에서 이지라는 청년이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놀랍게도 이 청년은 미디어 재벌 골드스키의 아들이었고 이 때문에 FBI 특별 수사관 스키너(멜깁슨)가 파견된다.

스키너는 호텔 벨보이를 자청하는, 좀 모자라는 청년 톰 톰(제레미 데이비스)의 도움을 받아 호텔에 묵고 있는 괴팍한 사람들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톰 톰이 매춘녀 엘로이즈(밀라 요보비치)를 사랑하고 있으며 유룍한 용의자로 꼽혔던 그녀를 중심으로 한 호텔 투숙객의 음모가 밝혀진다.

자살 사건 수사라는 미스터리의 외양을 띄고 밑바닥 인생의 감추어진 비밀을 파헤치는 드라마다. 저마다 말못할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이들이 서로를 감싸고 다독이기보다 사랑을 내버리는 음모를 꾸며 왔음이 밝혀진다는 우울한 이야기.

그러나 지능이 모자라는 톰 톰과 거리의 여인 엘로이즈를 순수의 축에 서게 함으로써 한가닥 희망을 품게한다.

옥선희 비디오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2/05/13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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