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PM6] 잠시 장수의 기개로 가슴을 연다

이렇다 하게 내세울만한 성과는 없어도 그럭저럭 한 주를 마감하는 즈음엔 은근히 소주 한잔과 그것이 주는 위안이 그리워진다.

잠잠해질만 하면 한번씩 떠도는 구조조정이니 감원이니 하는 살벌한 이야기에 삶이 팍팍해질 때, 갈수록 불투명해지는 앞날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엄습할 때, 목적 없이 달려온 삶이 문득 공허해질 때…그런 사연이 소주와 삼겹살을 떠올리게 한다.


소주한잔과 삼겹살의 여유

빌딩이 밀집해 있는 서울 삼성동 테헤란밸리 섬유센터건물 지하 2층, 구이 삼국지(02- 528-3345)는 그런 이유로 위안이 필요한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사무실 밀집지역답게 손님의 대부분이 넥타이부대인 이곳은 삼겹살과 소주가 주 메뉴지만 첫인상은 여느 삼겹살집과 달라 보인다.

입구에 놓인 신문고를 연상시키는 큰북은 억울하고 답답한 직장인을 위해 둥둥 울려줄 듯 하고 주방을 개방한 홀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늘어선 천막방은 전쟁의 한가운데 선 진영 같다.

돈국(돼지나라), 압국(오리나라), 우국(소나라)으로 이뤄진 구이 삼국지에서는 술 이름도 왕건주, 궁예주, 견훤주다. ‘통일을 꿈꾸는 황제의 야망’, ‘천하통일을 이룩한 황제에겐 숙취가 없다’ 등 황토 벽에 붙은 벽보도 시공을 초월하게 만든다.

얼마 전까지 폭발적 인기를 누렸던 사극 ‘태조왕건’ 세트장인 문경새재에서 힌트를 얻어 문을 열게 된 구이 삼국지는 110여 평 규모에 좌석이 200석이 넘지만 저녁시간은 늘 인근의 직장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전체 좌석의 70%는 예약을 받고 나머지는 선착순으로 손님을 받는다. 그래서인지 오후 8시가 채 안된 시각이지만 입구엔 대기표를 받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스트레스 해소처이자 취미생활처

이 집의 자랑은 허브가루를 뿌린 얼리지 않은 삼겹살과 이천쌀로 지은 하얀 쌀밥이다. 돌돌 말아 허브가루를 뿌린 삼겹살이 놓인 접시는 한껏 모양을 낸 한과나 특선요리 같다. 이천 쌀로 지은 밥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인기라고 연규선 부지점장은 귀띔해 준다.

이곳을 메우고 있는 사람들은 같은 자리에 같은 메뉴로 앉아있지만 사연은 각각이다. 때로는 사무실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한 잔 소주에 털어 버리려는 이도 있고, 그도 아니면 축하 받을 사연이 있어 마련된 모임도 있다.

동료 몇이 어울려 소주를 마시러 왔다는 지모(한국전력 근무·38)씨는 딱딱한 사무공간에선 할 수 없는 이야기도 이런 자리에선 스스럼없이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누구나 비슷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또 이런 자리를 통해 사내 정보흐름에도 밝아지고 더 많은 사람들을 알 수 있어 좋단다.

"이런 자리야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니까 부담 없어 좋죠. 접대를 해야 한다거나 내키지 않는데 눈 도장을 찍어야 하는 자리와는 다른 즐거움이 있습니다. 가까운 동료들과 직장생활하며 쌓인 스트레스를 이런 소박한 자리에서 푸는 셈이죠."

술자리의 매력은 이런 게 아닐까.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고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 며칠 째 계속되는 야근에서 벗어난 해방감…또 적당한 실수도 관대하게 용서가 되고 동료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함께 하려는 인정도 살아 있다.

한국인은 모이면 마시고, 취하면 다음날 다시 만나 웃고 함께 일한다는 이야기처럼 술자리에선 너나없이 관대해진다. 서너 잔 마시고 얼큰하게 취기가 돌면 남이 내가 되고 내가 남이 되는 까닭이다.

"운동을 한다거나 뭔가 자기계발을 하는 사람들이야 독한 마음을 먹어야 하지만, 우리 같이 평범한 직장인들이야 그저 퇴근하고 집에 가다 술 한잔하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취미생활도 겸하는 거죠." 한 직장인의 이야기처럼 달리 놀 줄도 모르고 퇴근 후 딱히 뭘 해야 좋을지 모르는 대부분의 직장인들에게 이런 술자리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창구이자 원기회복의 수단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몸은 안 따라줘도 퇴근 무렵만 되면 술의 유혹을 받게 된다.

왁자한 분위기, 노릇노릇하게 익은 삼겹살에 소주잔을 기울이는 사람들, 취기가 오른 얼굴로 무언가를 열심히 이야기하는 사람, 그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술은 인정이라던 한 시인의 말처럼 쓴 소주 한잔에서 삶의 위안을 찾고, 또 내일의 희망을 이야기하며 자신을 추스르는 건 아닐까.

서명희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2/05/16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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