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갈브레이스가 본 네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들 게이트 사건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한가할지도 모른다.

‘풍요로운 사회’‘불확실성의 시대’를 쓴 미국 하버드대 명예교수 존 K. 갈브레이스가 91세에 쓴 ‘친구라 부르며(Name Dropping)’에 나온 네 대통령을 되새겨 보는 게 그렇다.

갈브레이스는 캐나다 온타리오의 자유주의적 농부의 아들이었다. 버클리대에서 농업경제로 학위를 따고 감사가 되었을 때인 1932년 11월 프랭크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됐다.

그는 이후 하버드대로 자리를 옮겼으며 영국으로 건너가 케인즈 경제학을 연구하기도 했고 루스벨트 진영에 가담해 뉴딜정책의 연구교수로 자문을 해왔다.

독일이 1940년 프랑스를 점령하자 독일에 맞서 싸우게 된 루스벨트의 물가조정위원회 부위원장이 됐다. 가격통제와 배급제를 실시한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을 실현한 미국 최초의 경제학자로 기록 되고 있다.

그는 루스벨트를 ‘지성을 갖춘 사람, 사회적 책임감에 투철한 사람, 그 시대의 거대하고 험난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 대해 개방적이고 이 문제가 역사적인 것이다(좌파 편향이다)는 주장까지도 기꺼이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특히 “내가 대통령에게 내 생각을 팔 수 있다고 느끼게 하는 대통령이다”이라고 칭찬했다. 한때 물가통제위원장 대행일 때 의회와 보수파에 몰려 포천지 편집국장으로 저널리스트가 된 갈브레이스는 농업 경제학자답게 쉽게 루스벨트를 묘사했다. “

그는 미국이란 나라를 그의 고향인 하이드 파크의 농장을 확대한 것으로 생각하고 경영했다. 농장주인 그는 농장에서 일하는 시민과 노동자에게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통감했다. 그가 캔사스, 네브라스카, 다코타주 등 중서부의 황폐를 보고 대대적으로 식목을 하고 나무 벨트를 조성하도록 한 것은 바로 대지주의 마음이다.

그가 대지주로써 소작인에게 맡긴 토지의 모양을 갖추고 그 가치를 높이는 것은 바로 소작인을 돌보는 적극적 책임임을 안 것이다.”

이런 ‘대지주’인 루스벨트는 1945년 4월 승전을 앞두고 급서 했고 해리 트루먼 부통령이 대통령 직을 인수했다. 갈브레이스는 미주리 상원의원 출신인 트루먼을 알고 있었다. “적극적인 사람, 상식이 탁월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 유머 감각이 있고 1948년 재선 할 정도로 정치감각이 높은 사람”이라 평가했다. “트루먼은 대지주라 생각치 않았다 자신은 소작인이라 생각한다.

국민들도 루스벨트를 ‘프레지던트’라고 꼭 불렀지만 트루먼은 ‘해리 트루먼 ’이라고 했다. 루스벨트는 어떤 결정도 명확하게 공중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트루먼은 명확하고 간결하게 결정을 시민에게 알렸다. 다만 그는 자유주의자이면서 보수 공화당의 눈치를 너무 봤다. 한국 전쟁을 현 전선에서 마무리 지으려 하면서도 이를 공화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넘겨줬다.”

존 F 케네디는 그가 1930년 하버드대 조교수였을 때 학부 학생이었다. 1960년 월간 ‘에스콰이어’가 54명의 저명인사들에게 유력한 대선 후보를 지목해줄 것을 청했다. 케네디는 4표를 얻어 4위. 갈브레이스도 1표를 얻었다.

케네디는 ‘경제의 틀’을 바꾸어야 한다는 여론을 받아들여 갈브레이스를 그의 진영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케네디를 “청중이나 선거인단에게 자신의 정체를 명확히 하는 사람, 노동자들 앞에서 대통령이라는 직업은 짐 올리기 보다는 덜 힘들고 돈 많이 버는 것이다고 말하는 사람, 신념을 바뀌지 않는 사람. 아이리쉬 마피아(보스턴 출신 아일랜드 지식인)와 함께 백악관을 움직인 현대적 대통령”이라고 평가했다.

갈브레이스는 재클린 여사가 그의 사후 한 말로 케네디의 인물평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내 아이들이 자라 아버지가 그렇게 젊은 나이에 대통령(43세~46세)을 했다고 믿을까요. 또 살아서 늙은이가 되어 있으면(케네디는 1917년 생) 어떤 생각을 할까요.”갈브레이스는 돌려서 대답했다. “루스벨트가 서거 했을 때는 세상이 끝난 줄 알았다. 케네디를 잃었을 때 좋아하는 친구를 잃은 듯 했다. 그리고 삶은 계속됐다.”

린든 B 존슨은 1908년 갈브레이드와 같이 태어났고 두 사람은 뉴딜 정책의 실행자들이었다. “존슨은 공적 활동을 자기 탐익을 위해 하지 않고 사회 변화를 위해 택한 사람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 했다. 권력을 최대한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마음속의 진실은 숨기지 않은 사람이다. 다만 잘 알지 못하는 미국 국경 넘어 일에 매달려(베트남) 악몽을 꾸었다.”

갈브레이드는 “역사 자체는 돌덩이 위에 영원히 명기(銘記)화 된다. 그러나 이 역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의견, 해석은 변할 수 있고 제거 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자신의 책에서 결론을 내렸다. 우리 나라 대통령 후보들이 한 번쯤 귀 기울여 들을 만한 대목이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2002/05/16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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