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의 경제서평] 엔플록 성패의 조건은

■ 엔 블록과 동아시아 경제
김용복 지음
책세상 펴냄

짧은 이야기 하나. 어느 건강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매일 아침 특별한 음료를 마셨다. 자신의 건강이 그 음료때문이라고 믿고 그렇게 자랑하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중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별다른 일이 없었는데 왜 병에 걸렸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결국 그는 매일 마시던 음료가 건강을 악화시켰다는 결론을 내렸다. 만병통치약이 하루 아침에 만병의 근원으로 바뀌었다.

성경 이야기. 어린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과 싸우는데, 골리앗은 완전 무장을 한 반면 다윗은 겨우 돌멩이 5개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싸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누가 이겼을까. 예상과는 정반대로 다윗이다.

이 두 이야기는 이 책의 내용을 잘 말하고 있다. ‘책을 쓰게 된 동기’에 소개된 첫번째 이야기는 동아시아 경제에 관한 것이다. 일본의 기적, 네 마리의 용 등으로 칭송 받은 동아시아 경제의 성공 비법을 연구하고 배우려던 많은 학자들과 기업가들은 인식을 달리해야만 했다.

동아시아 경제의 성공 요인으로 꼽히던 여러 조건들이 하루 아침에 위기의 원인으로 비난 받게 되면서 많은 연구자들은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 진지하게 답해야 됐고, 그 고민의 결과가 이 책이라는 것이다.

‘들어가는 말’에 실린 성경 이야기는 ‘해결책’인 지역주의에 관한 것이다. 동아시아 경제 위기는 작은 국가들의 무능함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말할 것도 없이 오늘날에 있어 강대국은 골리앗, 약소국은 다윗이다.

그렇다면 국제 금융자본과 이에 편승한 강대국의 횡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러한 고민이 바로 지역주의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켰고, 과연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답이 이 책이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지역주의가 제기된 이유와 가능한 대안, 그리고 그것이 현실화하기 위한 조건 등을 다루었다. 이유는 1990년대 말의 동아시아 경제 위기가 가장 직접적이다. 소련의 몰락이 상징하는 냉전시대의 종언과 세계화의 급속한 진전은 이데올로기를 경제가 대체하는 냉정한 세상으로 바뀌었다.

전통적인 우방이 하루 아침에 무역 마찰과 시장 개방의 압력국으로 변신했다. 97년 태국에서 시작된 경제위기는 인근 국가로 쉽게 전염되었고,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식으로 작은 나라끼리 협력해 최소한의 보호막이라도 만들자는 논의가 일었고, 이것이 지역주의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어떤 식이 가능할까. 엔 블록이다. 동아시아 경제 강국인 일본의 책임과 역할이 크다는 점과 일본이 주도하지 않으면 실현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엔 블록하면 과거 일본제국주의가 주창했던 ‘대동아 공영권’이 떠오른다.

한국을 비롯해 각국이 기분 좋을 리가 없다. 이에 대해 저자는 엔 블록이라는 용어를 일본의 주도적인 역할에 의한 경제 협력 가능성이라고 하는 상징적인 의미에 국한시켜 사용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엔 블록은 실현될 수 있는가. 저자는 동아시아 지역협력이 어려운 이유로 3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탈냉전 시대에 냉전의 대립구조가 아직도 남아있다. 특히 동북아시아에서는 경제적인 문제도 중요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군사 안보적인 이슈가 더 지배적일 수도 있다.

둘째, 유럽과 비교했을 때 민족국가 단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이념과 이익 공유 의식이 부족하다.

셋째, 일본이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낮은 수준부터 시작해 점차 그 수준을 높여나가야 된다는 것이다. 가장 초보적인 것은 금융으로, 가령 일본 정부는 위기에 처한 국가에 긴급 융자를 해주는 제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지역협력체가 신자유주의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동아시아의 사회적 건설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동아시아 지역은 경제발전 단계의 차이, 문화의 이질성, 경제 정책의 다양함 등으로 경제 통합이나 지역 통화를 만드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갖고 있다. 특히 안보 차원에서 미묘한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는 동북아 지역은 협력에 있어 더 힘든 과정이 예상된다.

따라서 지역 협력의 논의와 결과들을 축적 시켜 제도화한 규범이나 형식으로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다. 책의 끝 부분에 있는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에 대한 논의는 문제제기 차원이다. 저자의 말대로 더 깊은 논의를 위한 ‘공간 제공’인 셈이다.

이상호 논설위원

입력시간 2002/05/1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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