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세상] "연결안되면 내가 노래부를께"

지난해 9월 11일 밤 10시 30분께. 당시 KBS 1라디오의 '라디오 24시'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던 필자는 여느 날처럼 그날 방송할 내용을 준비하고 있었다. 방송 시작 시간은 11시 10분. 마무리 준비를 하고 5층 라디오정보센터 사무실에서 4층의 생방송 스튜디오로 내려가려 부산을 떨고 있는데 TV 자막에 긴급 속보 자막이 뜬다.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빌딩에 비행기 충돌." "이게 뭔가? 경비행기가 조작 실수로 충돌했나?" 솔직히 당시 내가 첫 번째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11시 10분 큐 사인이 들어온다. 일단 준비됐던 오프닝은 취소하고 비행기 충돌 소식을 전한다.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에 비행기가 충돌했답니다. 자세한 소식은 들어오는 대로 또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곤 준비된 방송내용을 진행했다. 지금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뭔가 정부정책과 관련해서 대학교수와 인터뷰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인터뷰 도중 TV 화면은 무시무시한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거대한 여객기가 초고층 쌍둥이 빌딩에 정면으로 부딪히고 폭발하는 모습. 9.11 테러의 밤은 그렇게 시작됐다.

진행하던 인터뷰를 중간에 끊고 급히 들어오기 시작한 뉴스를 전한다. 그로부터 아침 5시까지 꼬박 6시간 밤을 새우며 생방송을 진행했다. 시시각각 새롭게 들어온 뉴스를 정리해 전하고, 현지 통신원들과의 인터뷰, 정부와 교민단체 등을 부산하게 연결하면서 그렇게 테러의 밤은 지나고 날이 밝았다.

10월 7일 미국의 아프간 공습으로 대테러전이 시작된 날도 상황은 같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날 생방송은 오전 2시까지만 했다는 정도다. 이날부터 나는 ‘테러 전문 엠씨(MCㆍ진행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올해 4월 15일 오전 김해 공항 인근 야산에 중국 민항 소속 여객기가 추락했다. 오후 1시 30분쯤 핸드폰이 울린다. "정선생, 급히 나와줘야 겠어." 현재 진행하고 있는 KBS 1라디오 "안녕하십니까 정관용입니다" 담당 차장의 목소리다. 긴급 편성 사고 속보를 진행해 달라는 말이다. 3시경 도착, 3시 30분부터 6시까지 생방송을 진행했다.

스튜디오에 들어서는 내게 주어진 것은 A4용지 한 장. 사고대책본부 아무개, 소방관 아무개, 중국 통신원 아무개 등 몇몇의 이름만 적혀 있다. 차례로 전화로 연결해 현장 소식을 묻는다. 잠시 후 항공대학 교수가 급히 도착, 스튜디오에 들어온다. 사고 현장 상황을 정리하며 사고 원인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잠깐 뉴스가 나가는 사이 화장실을 다녀와 다시 스튜디오로 들어가는데 담당 차장이 이렇게 말한다. "여기저기 연결해 보고 있는데, 안되면 내가 들어가서 노래를 부를께. 한 세 곡 하지 뭐." 사고와 관련된 이모저모 소식을 전해야겠는데 아직 연결되지는 않고 있었던 당시의 초조한 상황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하지만 노래는 필요 없었다. 그날 우리는 사고 비행기에 타고 있다가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입원한 여성분, 사고 비행기보다 약 5분 먼저 김해 상공에 도착했다가 김포로 회항했던 아시아나 항공 소속의 조종사, 사고 원인 조사를 위해 현지에 급파되어 산을 오르고 있던 건설부 당국자, 자원봉사에 나선 사람들 등등을 연결해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들을 전국의 청취자에게 전했다.

한 부상자는 인터뷰를 하는 도중엔 사고 당시 끔찍했던 순간이 떠올랐는지 전화선을 타고 울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부상이 심해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할 텐데 이렇게 전화로 괴롭혀 드려 너무도 죄송스럽다. 하지만 사고 당시의 생생한 상황을 전국 청취자들에게 정확히 알리기 위해 어쩔 수가 없다"는 말까지 해야 했다.

뭔가 큰 일이 터지면 사람들은 라디오를 켜고 KBS 1라디오를 찾는다. 거의 어김 없이 긴급 속보가 방송된다. 사건의 이모저모와 관련된 여러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너댓명의 PD와 작가들은 스튜디오 밖에서 전화통에 매달려 온갖 아이디어를 다 짜낸다. 진행자는 아무 준비도 원고도 없이 연결되는 순서대로 사건의 정확한 실체를 전하고,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질문들을 던진다. 이렇게 긴급속보는 만들어진다.

사고 없는 세상, 테러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

정관용 KBS 1라디오 "안녕하십니까 정관용입니다" MC

입력시간 2002/05/16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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