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균의개그 펀치] '꾼'눈에는 숫자도 끗수

내가 화투장을 처음 손에 잡은 것은 내 나이 불과 6살 때였다. 눈이 어두운 할머니가 동네 친구분들과 민화투를 치시다가 미처 못보고 지나간 '똥'이 옆에서 동전푼이나 떨어질까 기웃거리던 어린 손자 눈에 포착이 됐고, 총명하기 짝이 없는 어린 손자는 냉큼 그림이 맞는 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할머니가 판돈을 따는데 커다란 공로를 세우게 됐다.

할머니는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곁눈으로 민화투의 오묘한 법칙을 이해한 어린 손자가 대견하고, 신통해서 아예 옆구리에 끼고 앉으셔서는 본격적으로 민화투를 가르치셨고, 6살의 어린 사내놈은 민화투의 잔재미에 푹 빠져서는 할머니와 마주앉아 겨울 내내 화투장을 손에서 떨어뜨릴 줄 몰랐다.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대부분 할머니로부터 화투 치는 것을 배웠고, 어려서는 정말 재미있어서, 좀 커서는 효도 차원에서 할머니와 화투를 치고는 했다.

그 민화투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는 작가 오정희씨의 소설에서도 나온다. 제목은 기억이 안나는데 초등학생인 주인공 계집아이가 화투에 빠져서는 오빠와 학교도 안가고 벽장에 숨어 하루종일 화투를 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만큼 어린 아이들에게 화투는 화려한 그림과 색채감만큼 강렬한 재미를 선사했고, 요즘 아이들이 게임에 빠지듯 놀이의 한 부분처럼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하지만 이러한 몰두는 어디까지나 어렸을 때의 일이지 어른이 된 다음에도 일상사에 지장을 줄만큼 화투나 그밖의 도박에 빠져들지는 않는다. 물론 빠져드는 사람이 있기는 있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도박꾼'이라고 부른다.

도박병은 죽어서야 고쳐진다고 했던가. 어떤 사람이 도박판에서 손 씻고 새출발을 하려고 손가락을 잘랐는데 도저히 그 맛이 잊혀지지 않아 발가락으로 쳤다는 얘기도 전설처럼 떠돈다. 그런 사람은 아마 죽어서도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요단강을 건너가기는커녕 강가에 돗자리 펴고 앉아 다른 망자들까지 꼬여서 한판 거나하게 벌일 것이다.

불행하지만 연예인들 중에서도 도박에 중독이 되다시피 한 사람들이 몇 명 있다. 다들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했다가 몇몇은 아예 주저앉다시피 했다.

연예인 A씨는 소문난 꾼이다. 어디서 판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귀신같이 알고 뛰어간다. 가서 따기나 하면 다행인데 도박판의 '봉'이라 불릴만큼 남들 좋은 일만 시키면서 실컷 퍼주기만 한다는 소문이다. 언젠가는 100만원을 땄다며 밥을 사겠다고 팔을 잡아 끄는데 아주 죽을 맛이었다.

그 100만원을 따기까지 얼마나 많은 돈을 갖다바쳤을까를 생각하니 그가 사준 삼계탕이 마치 그의 고혈같아 목구멍으로 넘기기가 수월치 않았다. 만약 어느날 A씨가 도무지 연락도 안되고 아무런 이유없이 잠수를 탔다면 그건 틀림없이 어느 도박판에서 몇 날 며칠 밤샘 작업(?)을 하는 것이리라.

연예인 B군의 도박 경력은 그다지 길지않지만 결과만 놓고 본다면 몇십년 된 꾼들처럼 볼장 다 본 신세가 됐다. 그가 정선 카지노에 자주 간다는 얘기를 들을 때만 해도 젊은 애니까 호기심에 가나보다 했는데 날이 갈수록 추레해지는 몰골이 은근히 불안했다. 한번은 일을 끝내고 주차장으로 가려는데 B가 풀이 죽어서는 말했다.

"장 작가님 저 차 없어요."

인기를 얻고 나서 처음 장만한 재산이라며 B가 꽤나 애지중지하던 자동차는 알고 보니 정선의 어느 전당포에 맡겨져 있다는 것이다. 있는대로 돈을 털어넣다가 끝내는 타고 갔던 자동차마저 잡혀먹었다는 얘기에 나는 하도 기가 막혀서 냅다 B의 정강이를 걷어차주고 말았다.

정말 빈털터리가 되고 꽤 많은 액수의 빚까지 졌다면서 깨끗이 손 씻고 새 출발을 하겠다기에 도와주려고 지방 행사를 하나 잡아주었다. 같이 고속도로를 타고 가는데 B가 옆 차선으로 지나가는 차들의 번호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심심한데 돈내기나 할래요? 옆차들 번호판 끝자리 수가 높은 사람이 먹는거예요."

아, 얘 정말 중증이구나. 한숨이 나왔다.

입력시간 2002/05/17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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