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PM6] 떠나지 못하는 당신을 위한 쉼터

연일 TV속 광고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고 부추기고 있지만 직장인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그것의 비현실성에 대해 생각해 봤을 법하다. 그만큼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도, 떠날 줄 몰라서도 아니지만 이런저런 사연이 모든 것을 털고 떠나려는 사람의 발목을 잡는 게 현실이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굴러가는 일상은 때론 집도 일도 모두 잊고 떠나고싶은 직장인들에게 산과 바다를 대신할 색다른 휴식처를 떠올리게 한다.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운 직장인들에게 손쉬운 휴식공간은 어디일까. 아마도 사우나로 대표되는 휴식처는 아닐까.

서울 강남구 대치동 포스코 빌딩 뒤 태영불한증막(02-563-8866)은 직장인들이 즐겨 찾는 대표적인 사우나다. 동종업계 선발주자인 이 한증막은 비교적 시설이 넓고 쾌적해 직장인을 비롯한 일반인들에게는 물론이고 일본에까지 이름이 많이 알려진 곳이다.

벤처기업이 밀집한 테헤란밸리에 자리잡고 있는 만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근무시간에 별다른 구애를 받지 않는 낮 시간의 직장인부터 늦은 시간, 회식을 마치고 1박을 목적으로 찾는 직장인까지 다양하다. 하루 평균 이곳을 찾는 사람 수는 어림잡아 500여 명이며 그 중 40%가 직장인들로,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오후 10시를 넘어 몰리기 시작한다고 이재각 상무는 설명했다.

전날 과음으로 인한 컨디션 조절에 실패한 직장인들이 근무시간 중 짬을 내 사우나를 찾는 일이야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온 전통(?)이지만 최근처럼 회식 후 단체로 사우나를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은 24시간 연중무휴인 찜질방 개념이 도입되고 나서 달라진 모습이다.

500여 평 규모에 1시간마다 달궈져 나오는 불가마를 비롯한 옥체험실, 토굴찜질방, 진흙탕에서 각종 몸에 좋은 약재를 달인 인삼탕, 녹차탕, 정종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설을 이용하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한차례 술자리가 파할 무렵인 오후 10시, 이맘 때쯤이면 낮시간 동안 한증막을 점유했던 주부들이 하나둘씩 귀가하고 직장인들로 물갈이된다. 하나둘씩, 또는 대여섯 명씩 짝을 지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수가 부쩍 늘어나는 시간대이다.

실내에 들어서자 바깥보다 다소 높은 실내온도가 빠르게 휘감겨 온다. 편한 차림으로 수건을 목에 걸거나 머리에 감은 채 목침을 베고 여기저기 뒤섞여 자고 있는 남녀의 모습이 이채롭다. 거리낄 것 없이 무장 해제한 채 가부좌를 틀고 깊은 생각에 빠진 사람, 무언가 즐거운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 흡사 순례자의 모습 같기도 하고, 의식을 치르는 사람들의 행렬 같기도 하다.

인근의 한 벤처기업에 근무한다는 복모(34)씨는 "벤처 밀집지역이긴 하지만 밤새 야근을 한 뒤 눈을 붙이려는 직장인들보다 술 마신 뒤 피곤한 몸을 회복하려 오는 직장인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일반 사우나와 달리 술기운이 확 풀리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집이 경기도라는 또 다른 직장인은 회식 후 집에 가려면 택시비가 만만치 않은데 이곳을 개발하고부터는 그런 부담이 없어졌다고 한다. 버스나 지하철이 끊기면 이곳에서 한숨 자고 출근하면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훨씬 절약된다는 것이다.

퇴근 후 달려온 직장인 차모(40)씨는 처음엔 뱃살을 빼는데 찜질방이 효과적이라고 해서 다니기 시작했는데 몇 번 다녀보니 구속 없는 자유로움이 좋아져서 술 한잔 마시고 나면 꼭 들르는 2차 코스가 됐다고 설명했다.

사람을 알기 위해 같이 술을 마시고 목욕을 해봄으로써 한결 가까워지는 게 남자들의 문화라는 한 직장인의 이야기처럼 한 꺼풀 나를 벗고 마주하는 이곳에는 친근함과 솔직함이 함께 하는 건 아닐까. 또 그런 이유 때문에 진정한 인간관계에 목말라 하는 직장인들이 즐겨 찾게 되는 것은 아닐까.

밤의 사우나는 더 이상 동네 아주머니들의 수다방이나 나이 지긋한 노인들만의 휴식공간이 아니다. 술취한 직장인들이 새벽잠을 청하는 시내 한복판의 사우나는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는 직장인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휴식처이자 여행지인 것이다.

서명희 자유기고자

입력시간 2002/05/22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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