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巨匠] 한지작가 함섭

무위의 한국적 정서에 흔적 남기기

“40년 넘게 그림을 그려왔지만, 마음을 이토록 편하게 해 준 그림은 없었다”. 1994년 뉴욕 아트 페어에 출품됐던 그의 작품을 보고 현지의 노화가는 말했다. 화랑주인이자 큐레이터이기도 한 그는 즉석에서 100호짜리 한 점을 사 갔다.

“유화나 아크릴화만 본 것도 아니다. 한지의 경우, 간혹 콜라쥬 기법으로 찢어 붙여 완성시킨 그림은 봤지만 종이가 독특한 과정을 거쳐 이토록 새롭게 거듭나리라곤 생각지 못 했다” 이것은 비단 서양인의 생각만은 아니다.

‘환상적이면서도 뭔가 역동적인 화면을 가만 보고 있노라면 한국의 저력이 살아 숨쉬는 것 같아요.’. 지난 3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가졌던 전시회에 들렀던 KAL기 여승무원 안영림씨가 부쳐 온 편지다. 함씨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주시해 오다 천안서 사업을 하는 아버지와 함께 이번에 상경해 작품 직접 접하게 됐다.

그녀가 호도과자와 함께 부쳐온 편지는 ‘보고 있는 저 스스로가 참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로 끝맺었다. 한국의 정서, 삶이 한데 어우러져 무수한 얘기를 들려주는 듯 하다는 느낌을 사람들은 감상 후 보내오기도 한다.

그 주인공 함섭(60ㆍ본명 함종섭)은 한지 그림으로 독보적 일가를 구축한 화가이다. “딴 작가들과 달리 나는 프로”라고 그가 말할 때 울림은 남다르다. 대학 강의 등 후진 양성과 작품 제작을 겸하기 일쑤인 여타 화가들과는 달리 그림을 그려 파는 것으로만 생활을 꾸려나간다는 사실을 그는 그렇게 표현한다.

홍대옆 그의 작업실에 들어 선 사람은 먼저 방대한 작업량에 압도된다. 1년에 평균 120점을 웃도 작업량이다. 지금은 ‘Daydream(개꿈)’이라는 연작 시리즈를 두고 작업중이다. 1995년 이후 계속 이어지는 시리즈 작업이다. 이렇듯 그의 작업은 곧 그의 삶이다.


추상적이되 이질적이지 않은 작품 세계

얼른 보면 칸딘스키나 미로의 추상화 같다. 추상적 화면이되, 이질적이지 않다. 황토빛을 주조로 한 화면의 질감은 질박함을 넘어 투박하다. 울퉁불퉁하더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린다. 그러나 조금만 더 자세히 보자. 색깔마다 표면의 질감이 다르다. 거칠기 짝이 없는 표면에 한문 붓글씨로 쓴 선명한 문장이 눈에 띠는 대목에서는 나지막이 감탄이 새어 나오고야 만다.

한지에 먹이나 물감을 칠하는 것도, 한지를 자르거나 찢어 그림 도구로 쓰는 것도 아니다. 물을 흠뻑 먹어 거의 펄프 상태처럼 된 한지를 찢어 발기고 두들겨 변형시킨다. 서양적 소재를 일체 거부, 황토빛 색채를 위주로 정겨운 이야기들을 엮어 간다.

그 작업은 우리 것이라면 일단 얕잡아 들고 보던 ‘조국 근대화’ 시절의 고정 관념을 깨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종이떼기라고만 내몰렸던 한지는 1968년 우리나라에 유리가 도입됙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삶 자체였죠. 신발 바가지 함지박 대야 요강 우산 부채 같은 생활 소품들이 믿기지 않겠지만 모두 한지로 만들어 썼어요.”

작품에만 매진하고 있던 그를 먼저 알아 봤던 것은 물 건너였다. 1996년 파리 피아의 ‘한국의 해’에서 참여 작가 중 가장 뜨거운 호응을 얻었던 것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당시 서세옥 이강근 이주석 조덕현 등 함께 참가했던 국내 1급 작가들의 전시대 앞은 썰렁했다. 초대형인 150호를 포함, 모두 7점의 작품이 팔렸던 그는 귀국길에는 소품 몇 점만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렇게 해외에서 구매한 그의 작품은 미국이 150여점, 유럽이 100여점, 일본이 6점 등이다(그의 작품은 현재 100호 한 점에 16,000달러선). 지난 1월 샌프란시스코의 아트 페어에서는 드디어 그의 한지 그림을 모방한 위작까지 발견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는 국내 화가 중 자신의 세무사를 둔 유일의 인물이다. 1년에 100호짜리 그림이 최소한 30여점은 팔려 나가기 때문만은 아니다. 워낙 대형 그림이라 운송비, 스태프 비용 등 부수적 업무에 들어가는 경비만도 만만찮다. 아트 페어 한 번 갖는데 적어도 1만 달러는 소요되는 형국이니 재정을 꼼꼼히 챙겨 줄 전문 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가 붓과 물감을 들고 그림 그리는 것을 본 사람은 없다. 전통적인 캔버스 작업을 80년대 이후에는 완전 폐기했기 때문이다. 현재 작업중인 60호 짜리 그림을 만드는 데는 닥나무 껍질이 3만원 어치, 한지 7만원 어치 등 10만원 정도의 재료비가 든다.

한지는 풀을 흠뻑 먹여 맨밑에 깔고 난 뒤 닥나무를 수직으로 얇게 찢어 촘촘하게 붙여 가는 것이다. 그런데 2000년 자신의 한지 그림에 좀이 스는 것을 발견했다. 100% 한국의 순수 자연산 소재라는 데에는 예기치 못 한 복병이 숨어 잇었던 것이다.

수소문 한 끝에 경희대 한의학과의 본초과 연구소에 물어 보니 좀에는 황백나무가 특효라는 처방을 얻어 지금껏 따르고 있다. 구전으로만 얻어 듣고 있던 것을 과학적으로 확인한 그는 순수 자연물질로 최대의 골칫거리를 내쫓아 더욱 기뻤다. 화학 약품 등 아무런 인위적 조작을 가하지 않은 100% 자연의 아름다움을 추구해 온 자신의 원칙을 지켜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솔로 두드리는 독특한 작업

그의 한지 그림에는 한번 보면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마력이 있다. 물에 푹 불은 종이와 섬유질이 엉겨붙은 거친 표면에 복잡한 한자 글씨가 또렷이 찍혀 있는 것이다. 도저히 손으로 그려 넣을 수도 인쇄할 수도 없는 곳이다. 외국인들이 그의 작품을 보고 특히나 매료당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이것은 함섭이 고문서의 특성을 충분히 파악한 데서 나온 수확이다.

“잘 불은 문서를 계속해서 솔로 두드리면 종이 성분은 없어지는 대신 글씨만 또렷이 남게 되죠”. 시골서 가마솥을 닦을 때나 길쌈질 할 때 쓰는 소나무 뿌리로 만든 솔이 바로 그 마술의 주인공이다. 이 솔로 물에 푹 불은 고서를 몇 백번이고 치면 신기하게도 글씨만 남는 것이다. 작업때 솔로 두드리는 횟수가 최소한 1만번이라고 그는 말했다.

양인들이 눈 뜨고도 도저히 못 믿겠다며 신기해 하고 또 신기해 하는 대목이 있다. 물감 한 번 구경하지 못 한 그의 초대형 캔버스들은 가만히 살펴보면 조금씩 앞으로 휘어져 있다. 건조될 때의 장력이 튼실한 캔버스를 엿가락처럼 휘게 만드는 것이다.

그가 “나는 세상을 물처럼 살고 싶다”고 했을 때 그것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물감을 쓰지 않는 그의 그림은 모두 물의 조화에 의한 것이다. 한지 그림은 물이 깊숙이 배었다 모두 빠져 나와야 하나의 작품이 된다. 그처럼 자신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는 일이 다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겠다는 말이다. 조그마한 일 하나 이루면 그걸 가지고 윤색하고 포장하는 세태를 돌아다 보게 하는 삶의 태도다.

남 따라 하는 것은 천성에 맞지 않았다. 1950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1등한 함기용씨를 작은 아버지로 둔 그는 고등학교때 마라톤 선수로 그림도 그렸다. 그 시절 ‘해봤자 작은 아버지 뒤다. 그림으로 세계 제 1이 되자’라고 결심한 옹골찬 소년이었다. 그림으로 제일이 되자는 결심을 세운 그는 풍경화 정물화 가리지 않고 하루에 꼭 1장씩은 그리고 잠들었다. 그가 지금 1년에 적어도 100여작품은 내는 다작 작가로 자리잡은 데에는 이같은 내력이 숨어 있다.

홍익대 서양화과 1학년(62학번) 때 국내 최초의 도전인 강원도미술대전에서 모네 스타일의 수채화로 종합 대상(도지사상)으로 열린 상복은 끊일 줄 몰랐다. 2학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입상하더니 4학년때는 국전 반대 민간 전람회였던 제 1회 국민미술전에 특선 당선했던 일은 특이한 경력으로 남아 있다.

그는 대학 2학년때부터 박서보 이종무 등 현대 한국미술의 대부들의 조수(요즘의 연구 조교)가 된 최초의 학생이라는 작은 기록도 하나 갖고 있다. “매너리즘이야말로 작가에게 최대의 적이라는 작가 정신을 생생히 배웠죠.” 1학년때부터 김환기 화백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천혜의 환경이었다. 4학년때는 ‘오리진 그룹’에 가입, 파이프 그림으로 유명한 이승조 등 훗날 한국 화단의 중추적 인물로 기록될 사람들을 이웃처럼 보았다.

그는 1969년 제 3회 오리진전에서 작품 ‘H-68’을 출품, 최연소 출품자라는 작은 기록도 하나 세웠다. 그래픽을 방불케 하는 고도로 기하학적인 화면과 색채감은 국내 처음이었다. 그는 지금 43기 후배까지 있는 이 단체의 고문이다.


박서보 등 대가들에게 작가정신 배워

“동료들은 다 교수가 됐는데, 재기발랄하던 나는 사립고등학교 미술 교사라니 서글픈 생각이 들더군요.” 모친이 세상을 뜬 상태에서 등록금 마련은 커녕 생활 잇기도 힘들자 배문고에서 3년을 속앓이 하던 그는 사표를 던졌다.

박봉에 아침 7시 반에 등교하는 교사로서, 저녁 5사반이면 화가로 변신해 작업실을 찾는 생활만 해도 쏠찮았다. 더구 밤 11시까지 귀가해야 하는 아버지라는 일인삼역이었다. 그도 모자라 학생주임, 새마을 주임 등 학교의 주요 업무를 도맡아 13년을 지냈다.

재기발랄한 예술가라기 보다는 우직한 장인에 가까운 그의 근면하고 우직한 작업 태도에는 그만한 내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한 작품 완성에 적어도 1만번은 솔질을 해야 하는 수공업적 제작 과정으로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1990년 서문여고에서 사표를 쓰고 나온 그는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굽혀 본 적이 없다.

그러나 1995년 방배동 아피트 지하에 다달이 10만원을 주고 세들었던 작업실은 너무했다. 그의 독특한 작업이 조금씩 알려지자 유럽의 큐레이터들이 한둘씩 모였다. 독일과 화란에서 가졌던 개인전에서 소문이 났던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여름이라 재래식 변소에 꾀어 있던 파리떼가 몰려 나와 달려들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송연하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 일로 그는 이듬해 유럽 개인전을 가질 수 있었다.

이후 그의 한지화는 욱일승천의 기세를 탔다. 최근 들어 그를 보는 국내의 눈도 예전같지 않다. 올초부터 ‘뿌리 깊은 나무(KBS2)’, ‘한국의 미(KBS1)’, ‘리얼 코리아(SBS)’ 등 국내 TV가 경쟁적으로 그의 예술을 특집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지난해 9월 가졌던 개인전 ‘종이 혁명전’에 언론의 시선이 집중됐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최근 부쩍 증가한 사회적 관심보다 아들 영훈(31·판화강사), 딸 수정(29·성균관대 의상디자인학과) 등 자녀들이 아버지의 작업을 이해하고 훌융하게 자란 것을 더욱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장병욱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2/05/23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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