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화상] 어느 골목길의 40대

마흔은 제2의 사춘기, 인생의 마지막 승부에 도전장 낼 때

내 어머니는 어쩌다 싸구려 작은 화분을 사와, 물도 주지 않은 채 기른다. 그러다 몇 개월 지나, 집 한 쪽에서 말라 비트러진 화분을 발견하곤 이내 내다 버린다.

멀쩡한 화초를 송장을 만드는 게 싫어 스스로에게 탄식의 짜증을 내고 반성을 하는 듯 하다가도 언제 인 냥 다시 화분을 사들고 또 태연하게 말라버린 그것을 버린다.

어머니는 이제 80을 바라보고 있는 나이고 나는 아직도 철부지 40대 아들이다. 어머니는 40이 다 된 나이에 나를 낳으려고 새벽마다 인적이 귀한 인왕산 자락을 오르며 아들을 낳아 달라고 당신의 낡은 속곳을 오래된 고목 아래 바치고 치성을 드렸다 한다.

지성이면 감천인지 나는 태어났고 아버지는 늦둥이 아들을 보고 무척이나 기뻐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과거 이야기를 무수히 들으며 자랐다.

어머니 기억 속의 전쟁과 살아온 인생의 이야기는 내가 자라며 듣고 배워온 역사와 사실 속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나는 아버지가 집에 없는 날부터 그 얘기를 듣고 자라왔다.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돌아 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장례식 때를 떠올릴 때마다 “젊은 세월, 먹고 살만 하니 돌아가셨다”고 슬퍼했다.

사실 60대의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이 너무 이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아버지의 모습을 40대 중년의 죽음으로 바라보는 듯 하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안쓰럽고 애처로웠다. 어머니 가슴속에 남아있는 아버지는 아직까지도 40대 그림으로 남아있다. 40대의 숨가쁜 기억이 되 물림 되듯 내게도 마흔의 나이테가 찾아왔다.

지금까지는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음의 연장이고 우여곡절 끝에 결혼과 직업을 선택하고 자식을 낳아 길렀다면 이제 쉼 호흡 한번 할 수 있는 나이가 시작되고 떡갈잎 지고 풍성한 그늘이 펼쳐진 성숙의 시간이 찾아왔다고 믿고 싶었다.

어쩌면 40은 내게 제2의 사춘기라 해도 좋겠다. 세상 물정을 제대로 알고 자신의 인생의 좌표를 다시 그려보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꿈일 뿐 내 사춘기는 어느 밤거리의 골목길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어느 날 나는 온 몸에 반쯤이 술에 젖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머리 속에서 아직도 노래방 반주기의 멜로디가 흔들리며 맴돌고 내 다리도 그 리듬에 흐느적거리며 잠을 찾아 집으로 가고있었다.

그때 저 쪽 골목 어귀에서 비장한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보는 그 무언가를 마주하였다 그것은 칼을 빼어들고 순식간에 내게로 달려들었고 나는 눈을 감고 움찔하였고 제발 이것이 꿈이길 바랬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었고 내 몸은 그 칼에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나는 골목길 괴한의 단 칼에 죽었다. 갓 40으로 접어든 젊은 나는 그렇게 술에 취해 비명횡사를 했다.

이름도 모르는 낯선 누군가에게 이유도 없이 디지털 21세기에 칼에 베어 죽었다.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다음날 다시 설탕물을 먹으며 이불 속에서 살아났다.

쓰린 속을 비벼대며 늦은 약속시간을 맞추려 다시 허둥대며 옷을 입었고 언제나 처럼 다시 시간을 흥청망청 거리에, 술집에 뿌려대며 어제처럼 골목길을 향하여 걸어갔다.

그러다 번쩍 어제의 그놈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시간은 늦었다. 그놈은 팔이 하나 잘린 채 다시 저쪽에서 다시금 나를 노려 보더니 무서운 기세로 내게 돌진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속수무책, 다시금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질 수밖에. 한 가닥 희망은 어제처럼 오늘도 꿈이 되어, 단지 아침이 될 때까지 이 악몽을 견디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상처는 아파 오고 오가는 행인들은 쓰러진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침은 돌아오지 않고 나는 쓰러진 채로 숨만 헐떡이며 흥건히 피만 쏟아내고 있었다.

다시 해가 뜨고 아침이 되어도 나는 깨어나지 못했다. 어머니가 말라버린 화분을 버리러 나가시고 모습을 보고도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처럼 나는 꼼짝없이 이불 속에서 누워있었다.

이불 속에서 생각했다. 이대로 죽어야 하는가? 밤마다 골목길의 그에게 칼을 맞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를 피해 도망치며 살아야 하는가?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부엌에서 식칼을 찾아 들었다. 나는 천천히 칼집에 내 이름을 새기고 그를 맞으러 골목길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칼집에서 손을 절대로 떼지 않는 각오로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사춘기의 내 맘속에서 작은 유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기든 지든 싸움이 끝나면 나는 더 이상 젊음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사실 그 동안 제대로 싸워 보지 못했고 나는 제대로 쉬지도 못해왔다. 그러나 나는 오늘 밤 골목에서 마주칠 그에게 히든 카드가 없는 마지막 승부에 도전장을 내밀어야 한다.

이젠 더 감출 몸도 돌아 갈 길도 없다. 겸손이나 양보도 그런 여유도 이 골목에선 통하지 않는다. 자기 혼자 칼을 휘두르며 진을 치고 있는 저 동키호테 그 거울 뒤엔 이미 다른 후보 선수들이 출전을 준비하고 있을 거다.

그 마지막 싸움 앞에서 무엇이 나를 이토록 미치게 만드는 거라는 자각이 있고 누군가 잠시 멈춤을 요구한다. 그것은 또 다른 나의 마지막 유혹일까.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되어 자신의 몸이 그리고 그 꿈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이다.

40대는 자기 분신을 찾아 헤매는 고령의 사춘기 소년같이 슬픈 화상을 짓고 있다. 그래도 피해갈 순 없겠지 그러니 잠깐 쉬어가긴 그른 것 같다. 그렇다면 내일을 위해 도전해보자 .

박근형 연극 연출가

입력시간 2002/05/24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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