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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K2코리아 정동남 사장

[인간탐구] K2코리아 정동남 사장

 돼지 키우던 손으로 만든 한국대표 등산화

산이 좋아 산에 올랐는데 산보다 신발이 먼저 눈에 밟힌다. 피치 못할 30년 직업병이다.

“아무리 모양과 색깔이 비슷해도 제 눈엔 저희 등산화가 금새 보입니다. 등산을 갔다가 각 산마다 등산객 몇 %가 신었는지 비교를 한 적도 있습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있어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등산화 제조업체 K2코리아 정동남(63) 사장. 작지만 탄탄한 기업을 가졌다. 맨손으로 일으킨 사업 30년의 결과다. 등산화 내수시장 40%를 장악했다. 올 목표 매출액 400억원, 국내 공장은 물론 중국 현지에도 300명이 넘는 사원을 두었다. 동종업계에선 독보적이다. 그런데 어쩐지 사장님이 사장님 같지 않다.

그의 가까운 친구들 조차 버릇처럼 말한다. “학자라야 어울릴 사람이 웬 사업가냐.” 그럴법한 농담이다. 수 십년 사업을 하고도 사업가 때가 거의 묻지 않았다. 온유하고도 소탈한 성품에다 한번 사람을 믿으면 ‘콱 믿어버리는’ 성격도 예전 그대로다. 그 때문에 자칫 모든 걸 잃을뻔한 곤욕을 치르고도 여전히 사람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료값도 못건지고 무작정 상경

아주 힘겨운 세월을 건너왔다. 서천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한학자로 살던 부친의 뒤를 이어 농사를 짓고 살았다. 도무지 생계도 해결되지 않아 정부의 축산장려시책에 따라 소,돼지,닭도 키워봤지만 사료 값도 못 건진 채 5년 만에 끝을 맞았다.

젖먹이 장남을 안고 부부가 무작정 상경한 것이 1968년. 가진 돈을 모두 털어 마포의 가게가 달린 작은 방 한 칸을 얻어 구멍가게를 시작했다. 그러나 동네 터주가게의 위력에 밀려 실패, 연탄 판매업까지 벌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1년 만에 중랑천 부근 판자촌으로 옮겨가는 신세가 됐다.

생활이 막막한 터에 전부터 알고 지내던 한 구두 수선공의 권유로 같은 일을 하게 됐다. 도시락을 싸 들고 그를 찾아가 일을 배우기를 1주일. 다행히 손재주가 좋아 빨리 일을 익혔다. 곧바로 리어카에 도구를 싣고 거리로 나섰다. 집 가까운 공터에 자리를 잡고는 그날부터 리어카 옆에 쪼그리고 앉아 손님을 기다렸다.

“처음엔 아직 칼질이 서투르다 보니 멀쩡한 새 구두를 찢어놓는 등 실수를 저질러 손님한테 혼이 난 적도 많았습니다. 땀 냄새 퀘퀘한 구두를 만지고 있다 보면 간혹 처량맞은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아직 젊은 나이였고 처자식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달리 마음을 쓸 겨를도 없었습니다. 다만 언젠가 버스 운전기사가 된 초등 학교 때 친구를 우연히 손님으로 만나게 됐는데, 그때 버스운전기사라는 직업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꾸준히 손님이 늘면서 차츰 돈이 모였다.

나중엔 제화 기술자 한 명을 고용해 손님들의 주문에 따라 신발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그 기술자가 툭하면 과음으로 결근해 답답하던 그는 직접 제화 기술까지 배우기에 이르렀다. 생활의 안정을 얻은 후엔 꿈이 점점 확장돼 나갔다.

얼마 후 중심가에까지 진출하기 위해 모은 돈으로 무교동에 작은 가게터를 얻었다. 예상대로 수입은 몇 배나 껑충 뛰었다. 2명의 제화 기술자를 두고도 세 사람 모두 종일 쉴 틈이 없었다.


구두수선으로 시작, 등산화 제작

자신감이 붙으면서 본격적인 사업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유수의 대기업이 버티고 선 신사화 분야의 후발도전이란 무모해보였다. 마침 눈에 들어온 것은 당시 일본에 불어 닥친 등산 붐이었다.

머지않아 국내에도 그 열풍이 상륙하리란 짐작 아래 국산 등산화 제작에 눈을 돌렸다. 1970년 대 만해도 등산화라곤 수입품 아니면 군용 워커를 신고 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외제 등산화는 한국인들의 발에는 불편한 구석이 많았다.

외국인들의 발은 대개 길이가 길고 볼이 좁은 반면 동양인들의 발은 길이가 짧고 볼이 넓은 신체적 특성 때문이다.

1972년 당시 3ㆍ1 빌딩근처에 미싱 3대, 기술자 대 여섯 명을 갖추고 사업을 시작했다. 공장이라고 하기도 뭣한 아주 조그만 공장이었다. 전문기술을 전수 받을 곳이 없어 무작정 기존 실물을 속속들이 해부하고 따라잡는 것으로 첫 발을 떼었다.

외국의 유명 등산화마다 소재와 구조, 디자인을 분석하고 한국형에 맞게 꾸준히 고쳐나갔다. 전적으로 정 사장 자신이 감당할 몫이었다. 이렇게 해부 당한 등산화가 한달 평균 3켤레, 30년간 1,000켤레가 넘는다.

일단 시제품이 만들어지면 직접 신고 산행길은 물론 출퇴근 때까지도 일부러 자사 제품을 신고 다니며 문제점을 찾아 보완하기를 거듭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우리 기술로 만든 최초의 양산 등산화 1호 ‘로바’로 대형백화점 등에 납품돼 높은 매출을 올렸다.

늘어나는 수요를 보면서도 문제는 공장을 늘릴 자본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거래처를 뚫기 위해 찾아간 한 등산 장비업체에서 우연히 이야기가 흘러가 동업자를 얻게 됐다. 첫 번째 고통을 안겨준 장본인이다.

계약조건은 동업자로부터 장소를 제공받는 대신 50대50 비율로 수익 지분을 나누는 것이었다. 3년이 지날 때까지도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기대한대로 사업은 나날이 성장했지만 1974년 가을 미심쩍은 징후가 나타났다. “자체 상표등록을 하기로 하고 특허청에 간 사람이 공동 명의가 아니라 자기 이름으로만 상표출원을 하고 왔습니다. 본인 말로는 제 도장을 깜빡 잊고 가서 그랬다고 해서 속으로야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를 믿었습니다.

‘누구 이름이든 사업만 잘 되면 되지요 뭐’라고도 했지요. 그런데 몇 달 뒤 갑자기 ‘각자 헤어지자’고 하더군요. 일단 헤어지면 저는 자본이 없어 따로 공장을 차리지 못한다는 약점을 알고 진작부터 계획적으로 꾸민 일이었습니다.”

몇 달간의 피 말리는 싸움을 하다가 그의 억울한 상황을 지켜본 친구들이 자청해 자본을 대주었다. 가까스로 상황은 끝났지만, 끝내 자신이 땀 흘려 일군 상호와 상표는 상대에게 내주고 말았다.

1975년 ‘K2’라는 현재의 상표로 처음부터 다시 일어서야 했다. 두 번째 고비는 그로부터 약 10년 뒤에 찾아왔다. 처음보다 훨씬 더 야비한 일전을 치렀다. 주위의 권유로 영입한 한 대기업 임원출신 동업자가 통째로 회사를 ‘무전취득’하려는 시도를 벌인 것이다.

궁극적인 발단은 정 사장의 순수성에서 비롯됐다. 영입한 상대에게 그는 해외수출영업을 맡기는 대가로 사장의 지위와 50대 50의 수익배분, 심지어 나중엔 그의 영업에 지장이 있을까 봐 자신의 명의로 된 사업자 등록까지 스스로 상대에게 옮겨주었다.

개인의 득실도 넘어서서 오로지 회사를 키우고 싶었던 정 사장다운 용기였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사업자 명의가 넘어가자 그때부터 동업자는 엉뚱한 욕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 참에 아예 그를 밀어내려는 수상쩍은 일들이 나타났다.


동업자에 배신, 사업체 통째로 뺏겨

한 지붕 아래 차마 두 사장을 둘 수 없어 그는 부득이 회장으로 이름을 바꿔 달고 있었는데, 실 소유주인 회장도 모르게 공장을 이전한다며 몰래 부지까지 물색하러 다니기도 했고 어느날 전원이 비상 소집된 직원회의 때는 회장도 모르는 대거 인사발령까지 사장 마음대로 발표되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당신은 더 이상 필요 없으니 아니꼬우면 제 발로 나가라’는 표시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장부상 상당한 부채까지 꾸며놓음으로써 재무 상태를 최악으로 포장하고 있었다. 그를 빈손으로 쫓아 내기위한 사전 작전이었다.

“오로지 회사를 키우려는 욕심을 악용한 겁니다. 그 후 어느 날 사장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직원을 시켜 모든 장부를 가져오라고 한 뒤 혼자 회의실에 앉아 샅샅이 훑어보았습니다. 가만히 있다간 정말 꼼짝없이 회사를 뺏길 상황이라, 일단 상대의 약점을 잡아야 했습니다.

한참 뒤지다 보니 마침내 잡힌 것이 공금 횡령 사실이었습니다. 외국 바이어로부터 당연히 지급 받았을 돈에 대한 일부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겁니다. 혹시나 해서 직접 미국 바이어들에게 확인했더니 분명하게 입금시킨 날짜와 은행, 구좌번호까지 정확히 알려주더군요.”

뒤이은 그의 본격적인 응전. 모든 것이 불거지자 동업자는 노골적으로 ‘5,000만원을 줄 테니 회사를 넘기고 떠나라’며 속내를 드러냈다. 급기야 공금착복 사실에 대한 소송 준비까지 이르렀을 땐 밤마다 협박 전화를 하는 등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끝에 결국 1984년께 갈라섰다.

“하지만 지금껏 어디 가서도 그들을 욕해 본 적이 없습니다. 바로 그 배신때문에 제가 더 억척으로 일어섰기 때문입니다. 두 번이나 그런 일을 겪고 보니 각오부터가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돈이 없어 이런 일을 당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당신들 위에 올라 설 테니 한번 두고 봐라. 그 일이 없었다면 아마 저도 느슨하게, 되는대로 살아갔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제 사업을 가로챘던 사람들도 결국 둘 다 부도를 내고 망했습니다. 사필귀정을 믿냐고요. 그런 편입니다.”


사원이 주인인 회사, 세계적 브랜드 만들겠다

와중에도 가장 행복한 건 사원들이었다. 요즘 정부에서 추진하는 주 5일 근무제는 정 사장의 경우 이미 10년 전에 도입했던 것이다. 당시 주변의 우려 또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전보다 더 높은 생산성을 이끌어 낸 성공적인 사례였다. 그로 인해 증가한 수익도 전적으로 사원에게 되돌아갔다. 사원 1인 당 2자녀의 학자금을 대주는 장학제도가 실시됐고, 상여금도 최대 200%선에 불과한 제화업계 통례와는 달리 매년마다 회사의 수익 상승분을 충실히 반영, 어느 해엔 510%까지 지급된 적도 있다.

이직률 최저, 30년간 노사분규 한번 없었던 회사였다. 위태로 왔던 IMF의 고비도 1년 만에 극복, 한때 한 공장만 남기고 모두 문을 닫은 채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퇴직 사원들이 다시 뭉쳐 오늘까지 왔다.

5월 25일은 특히 뿌듯한 날이었다. 10여년간 머문 아파트형 공장 더부살이를 끝내고 멋지게 지은 새 사옥으로 자리를 옮겼다. 분산돼있던 공장들이 한 지붕 아래 모이게 된, 창업 30년에 어울리는 새 출발이었다. “1등과 2등 사이는 백지 한 장 차이입니다.

2등 보다 딱 한걸음만 앞서도 1등이 되는 겁니다. 항상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에게 답은 떠오르게 돼 있습니다. 직원들에게도 꼭 1등이 되라고 말합니다.

2,3등이 되면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뒤로 처진 채 남을 추격하는 것만큼 고단한 것이 없습니다. 저희 회사도 앞으로 언젠가는 세계적인 브랜드로 올라서겠다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글·사진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10@chollian.net

입력시간 2002/05/31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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