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大義는 권력을 이긴다

양순직(楊淳稙). 2000년 12월까지 자유총연맹 총재였다. 1987년 평화민주당 부총재로 김대중 총재와 민주당 김영삼 총재와의 야권단일화에 노력했다. 6ㆍ10 민주 항쟁 때는 민주헌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로 ‘6ㆍ29’를 서대문 교도소에서 수감 중에 끌어냈다.

1969년 3선 개헌 때는 공화당 국회 재경위원장으로 끝까지 거부한 3명의 공화당 의원 중 주도자였다. 공주중학, 서울대 사대출신의 그는 5ㆍ16 당시 해군 중령으로 해군 참모총장을 축출하기도 했다. 올해 77세. 이른바 동키호테식 정치인으로 보일 지 모르는 그의 짧은 정치이력은 5월 20일 나온 단행본 ‘大義는 권력을 이긴다’를 그냥 훑어만 읽어봐도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고뇌하는 시간들은 소중했다’는 부제를 단 369쪽짜리 이 책을 이화여대 진덕규 교수는 ‘진솔하고 치열한 정치인의 기록’이라며 추천했다.

그의 아내인 시인 정순자는 “당신은/ 한 그루 나무였다. /그늘도 만들고/ 열매도 맺으며/ 바람과 맞서며/고향 언덕을 지키는/ 고뇌하는 나무였다”고 그를 표현했다.

그의 책은 일제 말기 중학교 고학년이었던 1920년대 생인 DJ, YS, JP와의 인연과 광복 이후 한국 정치 환경속에 생성된 타협과 저항의 소용돌이속에 변모한 여러 정치지도자의 상(像)이 어떠했으며,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진솔하게 기술하고 있다. 제일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대의’라는 말이다. 후반에 특히 자주 나오는 말은 ‘자유 민주주의’다.

특이한 것은 많은 이들, 특히 3김씨가 지금쯤은 역사 앞에 한마디 해야 할 1980년 5월 24일 교수형을 당한 박정희 전 대통령 살해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언급이다.

‘10ㆍ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위원이기도 한 그는 ‘유신을 종식시킨 김 장군의 행위는 그 어떤 민주화보다 우선한다는 추진위원회 주장에 공감하며 그에게 늘 빚을 진 것처럼 느끼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1969년 9월 3선 개헌 반대에 나선 여러 사람들(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박종규 경호실장, 차지철 의원)중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특이했던 것으로 그는 기억한다. 김 사령관은 그를 ‘양 선생’이라 부르며 “대통령 뜻이 확고하니 이번만 생각을 바꾸는 게 어떠냐”고 말했다.

이를 거절하자 김 사령관은 “3선 개헌에 대해 저도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저는 각하의 측근으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JP의 공주중학 2년 선배. 그는 유도부장이었고 JP는 검도부여서 학교 다닐 때는 잘 모르는 선ㆍ후배 관계였다. 1960년 4ㆍ19후 JP가 육군에서 정군운동을 할 때도 그는 누구와의 연계도 없이 해군에서 1인 정군운동을 벌였다. 그는 ‘군사혁명이 일어나야 하는 상황은 참으로 비극적인 경우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혁명이후 개인적인 소신과 신념으로 군사정부에 참여 하였지만 이런 일은 이때 단 한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1969년 JP는 3선 개헌을 기도하는 박 대통령에 몰려 모든 공직을 떠났다. 그는 이때 23명의 공화당 의원으로부터 반개헌 서명 의원직 사퇴서를 받아 들고 있었다. 7월 25일 박 대통령의 개헌 담화가 있자 JP는 개헌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JP는 그를 ‘양선배’라 부르며 집으로 두 번이나 초청했다.

“지도자가 한번 몸가짐을 그르치면 다시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이번에 제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5ㆍ16 정신으로 돌아가십시오. 이것은 당의장(JP)과 대통령간의 의리 문제이기 전에 대의의 문제입니다. 정치 신념을 살려야 하지 않습니까?” 이 말 이후 그와 JP와는 그렇고 그런 관계다.

1969년 새해 박 대통령과 단독면담을 하고 나오며 그는 ‘대의’와 ‘의리’문제를 생각했다. 박 대통령은 그가 JP를 대통령으로 밀기 위해 3선을 반대하는 의리문제로 생각 하는 것 같았다. 그에게는 3선은 이승만을 닮은 불행을 가져 온다는 “의리를 초월한 큰 의리”였다.

국어사전에는 ‘대의’는 “사람으로서 특히 국민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의리”로 풀이하고 있다. 국민을 위해서 자기만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생각은 의리도 대의도 아니었다. 그는 JP에 대한 의리보다 대의 때문에 3선 개헌을 반대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 ‘대의’와 ‘한번의 쿠데타면 족하다’는 굳은 신념 때문에 그는 1987년 ‘6ㆍ10 항쟁’을 주도했다. 이어 나선 것이 야권후보 단일화 운동이었다. 그는 DJ에게 “YS 재임 기간 중 대통령을 하지 않을 뿐이지, 대통령 자리는 앉아 있어도 굴러 옵니다. 고문(DJ)께서 하지 않으려 해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면서 우선 양보를 권고했다.

DJ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다. 네 사람(노태우 JP, YS, DJ)이 나와야 내가 이긴다. 내가 호남과 서울에서 압승만 거두면 승리한다”며 거절했다. 6ㆍ25후 해군 중위일 때 목포일보 사장이었던 DJ는 자신에게 “젊은 사람이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초선 의원으로 63년 같은 재경의원으로 만났을 때 “미래를 준비하는 의원”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양씨는 기억한다.

양씨는 ‘대의’의 노 정객이 정치인을 떠나 자유민주주의 계몽가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결론 내리고 있다. “사심이 없고 도덕적으로 당당한 권력만이 국민들의 삶을 복되게 이끌 수 있다. 어떠한 권력도 대의를 이겨낼 수 없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2002/05/31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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