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세상] 마음을 움직이는 편지의 힘

입사해서 처음 맡았던 프로그램도 편지쇼였고 지금까지 가장 많이 제작해본 프로그램이 < 안녕하세요 , 황인용 김미화입니다 >( 여자 엠씨는 자주 바뀌었지만 ) 라는 편지쇼지만 , 할 때마다 , 매일매일 난 놀란다 . 어쩌면 이렇게도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끊임없이 편지로 날아올까 싶어서다 .

우리 프로그램 뿐이랴 . 타 방송사에도 각종 편지쇼가 있고 그 역사도 20 년이 훨씬 넘었다 . 이렇게 인기가 있으면 텔레비전에서도 각광을 받아 마땅한데 아직 본격적인 편지쇼만큼은 라디오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

이상한 일이다 . 왜 편지는 라디오에 더 어울릴까?

텔레비전 모 프로그램에서 편지쇼 형식을 도입하며 우리 프로그램에 편지를 좀 달라고 협조를 요청한적이 있다 . 같은 방송국이고 해서 몇 번 편지를 주고 프로그램이 어떻게 나오나 본 적이 있는데 참으로 이상한 건 진행자가 편지를 읽는 걸 화면으로 보는 순간 , 그 편지의 감동은 반 이상 뚝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

나만 그런가 싶어 몇 사람에게 의견을 물어보았지만 , 반응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 편지만큼은 읽는 모습을 직접 보니까 집중도 안되고 감동도 별로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

라디오가 주로 일하면서 , 이동하면서 듣는 매체라는 것까지 감안하면 편지가 라디오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

왜 그럴까 . 나름대로 생각해보니 , 편지의 특수성과 라디오의 특수성이 똑 떨어지기 때문인 것 같다 . 나부터가 이제는 웬만해선 편지를 쓰지 않는다 . 너무도 편리한 메일이 있기 때문이다 . 게다가 메일은 수신확인까지 되니 , 상대방에게 제대로 잘 전달되었는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얼마나 편한가 .

그렇지만 아주 가끔 나도 편지를 쓴다 . 누군가에게 정말 내 진심을 간절하게 표현해야 할 때는 메일보다는 편지 , 그것도 직접 펜으로 쓴 편지를 쓰고 싶어지고 그래야 할 것 같다 .

편지야말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뭉클한 그 무엇이 없으면 쓴다는 것 자체가 고역이지만 편지만큼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갖고 있는 것도 드물기 때문이다 .

내가 가장 고이 간직하고 있는 것은 남편이 보낸 그 어떤 선물도 아닌 처음 싸우고 회사까지 찾아와 건네주고 간 , 손으로 직접 쓴 편지다 .

내 지갑 속에 늘 간직하고 있는 것 역시 잘 살아보자는 그의 짧은 편지다. 아무리 세상이 편하고 빨라졌다 해도 편지의 힘은 그런 것이리라 . 누가 전자메일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보고 또 보고 하겠는가.

그러나 편지는 다르다 . 편지에는 느낌이 있다 . 편지에는 상대방의 숨결이 녹아있고 , 감정이 , 상황이 그대로 전달된다 . 라디오가 바로 그렇다 .

'라디오는 내 친구'라는 우리 KBS 로고송도 있지만 라디오는 편지처럼 한물간 것 같지만 , 어딘가 정겹고 따뜻하고 친밀한 매체다 . 라디오스타가 오래 가는 이유도 그래서다 .

얼마전 , 브라질 최고의 라디오 스타가 70 세가 훨씬 넘은 할머니라는 통신원의 이야길 들었는데 그 할머니는 아주 다정다감하시다고 한다 . 한마디로 할머니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쭉쭉빵빵' 팔등신 미인을 보면 눈이야 즐겁겠지만 위로를 받는 건 아니지 않는가 .

내가 힘들고 지쳐있을 때 , 기쁠 때보다는 슬플 땐 엄마 같고 , 누이같은 라디오가 힘이 될 수 있다 . 인절미의 콩고물 , 비빔밥의 참기름처럼 똑 맞아 떨어지는 편지와 라디오 !

요즘 세상에 누가 편지를 쓰냐고 연필과 종이가 사라지지 않는한 , 우리 혈관에 따뜻한 피가 흐르는 한 눈물과 웃음을 사람들이 잊어버리지 않는한 , 라디오도 편지도 사이좋게 우리 곁에 있으리라.

조휴정 KBS 라디오 2 국 프로듀서

입력시간 2002/05/31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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