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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巨匠] 가야금 명인 황병기

 국악은 생명력 있는 전통적 가치의 구현

“어떤 식으로 하건 좋다. 국악기를 전자화해도 상관이야 없지만 문제는 어느 정도 감동적인 작품이 나오는가에 있다.” 바로 그 정신으로 가야금 명인 황병기(66)는 언제나 최전방에서 살아 왔다.

그러나 가열찬 전위 정신이 결코 겉돌거나 휘날리지 않는 것은 정통에 깊이 착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국악 지상주의자도 아니다. “국악을 곧 애국심으로 직결시키는 도식이 싫어요.” 때론 가장 전통적인 것에서, 때론 가장 아방가르드적인 것에서 그는 국악의 존재 방식을 탐색해 왔다.

“논어를 보세요. 사달이이의(辭達而已矣ㆍ말이란 일체의 상대에게 통하기만 하면 된다)라고 했잖습니까.” 일체의 세련이나 수식 따위는 필요 없다는 그 말은 곧 그의 음악적 본질이기도 하다.


밀려드는 일감 정년 퇴임 이후 더 바빠

그에게는 재직시보다 일감이 더 밀려들고 있다. 2001년 8월 정년으로 캠퍼스는 떴지만 가르침과 연주의 발길이 더 분주해졌다. 국악은 황병기 이전과 황병기 이후로 나뉜다. 가야금 하나로 전통과 현대, 한국과 세계의 간극을 허문 그는 이화여대 음대에서 정년 퇴임한 이후가 오히려 더 바쁘다.

25대의 각종 가야금 중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자신의 사랑채에 갖다 놓고 수시로 튕기는 가야금이 서 너 대다. 여기에 잘 갈무리 된 난초, 문갑, 장고 등이 어우러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에서나 느낄 법한 고졸미가 그의 사랑방에서는 풍겨 난다.

한국종합예술학교 전통예술원 가야금 실기학부 마스터클래스에서 대학원생 제자들이 찾아 와 가르침을 얻어 가는 곳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가르침 중 극히 일부다.

연세대 교양학부의 교양과목 ‘국악의 이해’는 인기 최고의 강의다. “공부를 즐거움으로 체험하는 시간이죠. 가르치기 보다 연주하는 기분으로 강의하다 보면 시간이 후딱 흘러가요.” 어떤 학생들에게는 시험 볼 때 커닝 페이퍼를 만들어 와서 답안을 작성하라는 그의 독특한 ‘커닝 양성화’ 방침이 더 입맛 당길 지도 모른다.

그는 6월 7일 가나 아트센터에서 공연할 ‘황병기 가나 아트 콘서트-뜨거운 여정’을 총지휘해야 한다. 17일은 아셈 빌딩에서 ‘월드컵 취재 외국 기자단을 위한 콘서트’를 공연한다.

특히 이날 공연은 김대환(프리 재즈 타악 주자), 김정수(용인대 교수ㆍ장구), 김용구(국립국악원 수석ㆍ가야금), 강은일(해금), 장영규(로커), 강산에(로커), 이종지경(무당), 심철종(행위예술) 등 초장르의 꾼들과 벌이는 한판이다. 요컨대 황병기는 그 심상찮은 판들을 집전하는 제주(祭主)인 셈이다.


자기류의 산조에 도달한 음악세계

그는 한번도 관광차 외국 여행을 한 적이 없다. 모두 연주 여행이다. 물 건너가면 반드시 현지 음식으로 끼니를 채운다. 냄새 나는 프랑스 치즈도 마다 않는다. 마음의 문을 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태도다.

“가장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이죠.” 그는 풍류 가야금(정악)과 산조 가야금(속악)은 물론 합성섬유 현의 17~25현금(琴)까지 두루 통달한 최초의 국악인이다. 가야금의 음역 3옥타브 안에서 전통에서 전위까지, 넓은 행보를 보여 온 그의 음악 세계는 깊어져 마침내 자기류의 산조에 도달했다.

6ㆍ25때 월북해 인민 배우가 된 전설적 명인 정남희의 가야금 연주가 그 실타래였다. 1990년 평양에서 열렸던 범민족 통일음악회에 남측 대표로 참석했을 때 북한에 있던 정남희제 녹음 테이프를 찾았다. 일제 치하에서 정남희가 녹음해 둔 SP판에도 없고 스승 김윤덕이 알려주지 않은 가락이 바로 거기 있었다.

“내가 50년 세월을 공들여야 했던 모든 문제의 해답이 다 들어있더군요.” 한국 가야금 산조에서는 가장 방대한 8악장 70분짜리의 ‘정남희제 황병기류 산조’가 1998년 그렇게 빛을 보았다. 반세기 가야금 인생의 숙원이 풀리던 때였다.

전통주의자로서 황병기의 정수가 확연히 드러난 작품이 ‘숲’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의 창조력은 베끼기(copy)를 허용하지 않는다. 백성이 즐기던 산조(散調)는 가운데에, 선비의 풍류인 가곡(歌曲)은 앞뒤에 배치한 3악장 구조의 작품이다. 분명 전통적인 것에 뿌리를 뒀지만 사람들은 별개의 음악, 그것도 현대음악으로 볼 정도였다.

그와는 반대로 혁명적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미궁’이다. 현을 뜯지 않고 첼로의 활을 써서 켜서 소리 내는 방식에서부터 귀곡성을 연상케 하는 소프라노(현대무용가 홍신자의 구음(口音))까지 다룬다.

1975년 초연 당시 일부 관객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 나가게 만들었던 문제작이다. 요즘이라면 그런 작품을 두고 “엽기적”이라 해서 호사가들의 입맛을 당겼겠지만 당시 국내의 권위주의적 분위기는 그 같은 작품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재공연 금지 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1년 5월 당시 구음의 주인공 홍씨를 비롯, 김일륜(가야금) 미사루 소가(조명 퍼포먼스) 등 그를 좇는 젊은 예인들이 ‘미궁’을 공연하는 등 그의 음악이 다시 조명 받기도 했다.


무한대로 치닫는 음악적 분량

그의 음악에는 원심력과 구심력이 서로 긴장적 조화를 이루며 살아 있다. 그래서 영원한 현재 진행형이다. 세계성과 전통성이 앞서거나 뒤서며 공존한다. 그는 재즈를 듣는다. “1960년대 말 접하게 된 ‘재즈의 성자’ 존 콜트레인을 숭배하죠.

대곡 ‘Africa’나 ‘Selflessness’ 같은 곡은 요즘 들어도 흐뭇해요.” 마음에 드는 음악은 ‘흐뭇하다’, 그렇지 못 한 음악은 ‘서운하다’라고 표현하는 독특한 등급 표시법이다. 재즈에 대한 깊이 있는 언급에서 그의 방대한 음악적 분량이 확연히 느껴진다.

그에게 재즈란 단순한 여흥용 음악이 아니라 난해한 이론과 고도의 즉흥성으로 무장된 탄탄한 음조직인 것이다. 1970년대 이후로는 정월 초하루 차례를 지내고 난 뒤에는 스트라빈스키의 충격적 현대 음악 ‘봄의 제전’을 꼭 듣는다는 진술은 그의 예술적 진보성을 유감 없이 드러낸다.

‘바람이 대나무 밭에서 불면 대나무가 울지만, 바람이 지나지 않으면 대나무는 소리를 남기지 않는다’. 대학시절 접해 지금도 애송하는 ‘채근담’ 중의 한 구절이다. 그의 가야금 연주에서는 음이 끊긴 자리, 여운이 주는 잔향감이 오래도록 남는다.

그는 놀랍게도 초등학교 3학년까지 낙제생이었다. 게다가 골칫거리 개구쟁이였던 소년 황병기가 마음을 고쳐먹게 된 것은 그의 외당숙(김소열) 덕택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틈 만나면 장난치던 그는 급기야 방과후 남아 놀다 당시는 귀하던 유리창을 깨뜨리고 말았다.

집에 온 그는 친히 지내던 아저씨에게 털어 놓고 이야기했다. 아저씨는 “평소보다 30분 일찍 나와 어제 한 일을 다 말씀 드려라. 그러면 선생님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 칭찬 받고 영웅처럼 될 것”이라며 격려했다.

이후 그는 자신이 옳다 믿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보고 피하지 않았다. 낙제생은 한 학기 만에 우등생이 됐다. 그리고 서울대 법대생이 됐다.

그러나 전국국악경연대회 등에 기악부 1등을 차지하던 이 학생을 서울대 음대 학장 현제명 교수가 눈 여겨 봤다. 마침 대학 졸업 당시 생긴 국악과 강사를 맡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1주일에 1시간만이라도 맡아달라던 권유가 아직도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대학시절 국립국악원에서 만나 1952년 결혼한 5살 연상의 부인과는 아직도 “자기”라 부른다. 소설가 한말숙씨가 그 주인공이다. 부인은 요즘 컴퓨터 앞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15년의 공백을 깨고 발표한 작품 ‘아름다운 영가(靈歌)’에 대해 계약금(1,380달러)의 계약금을 보내더니 최근 인터뷰까지 요청한 이탈리아 출판사 등 국내외 출판사들과의 통신 때문이다. 1983년 폴란드에서 ‘영혼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했던 작품이다.

둘의 인연은 대학시절 가야금에 매료된 한씨가 국립국악원을 찾아 온 것으로 시작됐다.제삼자에게 서로를 칭할 때는 거리낌 없이 이름을 불러 처음 듣는 이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이들은 젊은 부부다. 서로의 생활에 절대 간여하는 법이 없다. 1층은 부인이, 자신은 2층에 사는 생활이 결혼 이래 쭉 이어져 오고 있다. “밥 먹을 때는 내가 내려가죠.” 봄이면 깎지만 찬바람이 돌기 시작하는 늦가을부터는 기르는 수염 역시 자연스럽게, 자신답게 사는 방식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엄청난 恨의 분출 표현

“다음 학기부터는 일을 줄여야겠어요.” 두 가지 커다란 일감이 밀려있는 현재 상태를 고려해 보면 필연적 선택이다. 애제자 이재숙이 주관하는 ‘아시아 금(琴) 교류회’와 10월 열릴 하윤정의 ‘거문고 독주회’로부터 곡을 의뢰 받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신용보증기금, 이화여대 음악연구소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들어 오는 특강 요청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백남준 등 함께 작업했던 거장들의 세계를 조명하는 TV 등의 기획 프로그램에서 들어오는 인터뷰도 물리칠 수 없는 입장이다.

“올림픽 금메달 수상식장이나 이산가족 재회 현장이나 한국인들은 가장 기쁜 순간이면 언제나 울지요. 내면에서는 연습과 고통으로 비롯된 엄청난 한이 분출되고 있는 거죠.” 전통적 가치로 끌어 안은 전위, 슬픔의 옷을 입고 나오는 기쁨, 그를 통해 도달하는 생명력, 바로 이것들이 그가 표현해내고자 하는 우리의 음악이다.

장병욱 주간한국부 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2002/05/31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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