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업 소환 연기…올가미가 허술해서?

검찰 정치권 반발·오해소지 무릅 쓴 결정, 수사 장기화 예고

검찰과 김홍업(金弘業) 아태재단 부이사장간의 쫓고 쫓기는 신경전에 한나라당이 가세했다. 그간 홍업씨 수사에 관한 한 비판을 자제하던 한나라당이 검찰의 소환연기 방침에 발끈하고 나선 것이다.



한나라당 발끈, 특검제 카드 꺼낼 수도

한나라당은 5월 25일 서청원 대표가 직접 나서 “검찰이 홍업씨의 소환 및 사법처리 절차를 월드컵 이후로 연기하겠다고 밝힌 것은 정쟁중단 선언을 악용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나아가 한나라당은 “국민의 뒤통수를 치는 행위”라며 원색적 표현까지 들먹였다.

검찰은 원인제공을 한 점은 인정하면서도 못내 섭섭하다는 표정이다. 대검 중수부 관계자는 “수사중단의 의미가 아닌데 한나라당이 뭔가 오해를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아직까지는 검찰의 소환연기가 누구에게 유리할지 예측하기 힘들다. 관전자인 한나라당은 차치하고 검찰과 홍업씨 모두 만만찮은 부담을 지게 됐기 때문이다. 칼자루를 쥔 검찰은 야당의 비판속에 일방적으로 수사기일을 벌어놓았지만 결과가 신통찮을 경우 뒷감당이 두렵다.

홍업씨도 더욱더 자신을 옥죄고 들어올 검찰의 올가미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는 형편이다. 결국 소환연기는 한쪽에게는 독약이, 다른 한쪽으로선 보약이 될 수 밖에 없는 제로섬(Zero-sum) 게임인 셈이다.



24일 오전 홍업씨 수사의 야전사령관인 김종빈 중수부장이 갑자기 기자들에게 점심을 제의했다. 그는 지위상 이명재 총장의 최측근이기도 하지만 성품면에서도 이 총장과 유사점이 있다. 우선 말을 아낀다는 점이 닮았고 적을 만들지 않고 예민한 문제는 웃음으로 넘기는 묘한 재주도 비슷하다.

기자들과 터울없이 친하지만 정작 중요한 내심은 비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실무적으로도 98년 세풍(稅風) 수사초기 중수부장과 수사기획관으로 한솥밥을 먹었다. 주위에서는 “세풍때는 한나라당 수뇌부를 노리더니 이제는 현정권의 핵심을 겨누게 됐다”며 “인연치고는 기이한 인연”이라고 말한다.

그러던 그가 먼저 식사자리를 마련한 것에 대해 기자실에서는 가벼운 웅성거림이 일었다. “뭔가 발표거리가 있나 보지?”라며 기자실을 나서던 한 기자의 예측처럼 그는 식사도중 홍업씨에 대한 소환연기 카드를 꺼냈다. 전달과정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가감없이 그의 얘기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억측 구구, 검찰 “믿어달라”

“홍업씨 소환은 월드컵 이후로 미뤄야 할 것 같다. 국가대사인 만큼 언론도 양해해 줄 수 있지 않느냐. 그렇다고 수사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계좌추적 중심으로 하고 관련자들 소환도 하겠다. 검찰 내부적으로도 일단 있는 것을 갖고 불러서 조사하고 다시 보내고 하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수사팀의 생각은 다르다. 불렀다가 보내면 여론이 가만히 있겠느냐. 공연히 오해만 살 것이다. 지금 부른다면 조세포탈로 밖에 할 수 없는데 그것도 문제다. 김현철씨 때는 사상 초유의 일이고 구속시킨다는 것 만으로도 여론에 충격이 컸다. 그러나 홍업씨의 경우에 단순히 조세포탈로만 한다면 여론에서도 수긍을 하겠느냐?”

이상에서 보면 한나라당이 검찰의 소환연기 방침을 오해한 부분이 틀림없이 있다. 김 중수부장의 말에서는 최소한 수사중단을 의미하는 문구는 없다. 하지만 오해의 소지도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소환연기의 이유가 수사할 시간이 필요해서인지 아니면 대통령의 아들을 월드컵 기간 중에 부르기가 부담스럽다는 건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수사팀은 절대적으로 전자쪽이라고 밝히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수사팀 관계자는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하다. 그 흔한 제보나 폭로도 없는 상황에서 기댈 곳은 철저한 계좌추적 뿐이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월드컵 기간중이라도 혐의가 발견된다면 원칙대로 소환한 뒤 사법처리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의문점은 대검 중수부가 지난달 1일 수사착수이후 두 달 가까이 뭘 하고 있었는지에 모아진다. 검찰안팎에서는 “중수부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수부의 명성에 걸맞는 수사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사실”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중수부측은 “새가 날아야 떨어뜨릴 것 아닌가”라고 반문하고 있지만 예상못한 수사팀의 부진은 그간 청와대측의 압력설ㆍ홍업씨측의 조직적 사건은폐설ㆍ예정된 불구속기소설 등 갖은 억측을 낳아왔다.



검은돈 흘러들어간 정황 포착

검찰은 3월25일 특검팀으로부터 수사자료를 넘겨받은 이후 홍업씨 고교동기인 김성환씨가 관리해온 차명계좌에 대한 자금추적을 계속해왔다. 당초 6개 계좌에 90억원 가량이던 김씨 자금규모는 50여개 차명계좌에 250억원으로 불어났다.

검찰은 이중 김씨가 6개 업체로부터 각종 청탁 대가로 8억2,000만원을 받은 사실을 밝혀내는 한편 홍업씨 주변에서 출처가 의심스런 70억원대의 자금을 발견했다.

검찰은 홍업씨가 김성환씨에게 18억원을 빌려주고 28억원을 돈세탁한 사실을 밝혀냈다. 또 홍업씨 대학동기인 유진걸씨 차명계좌에선 실소유주가 홍업씨로 의심되는 32억원이 발견됐다.

이러한 수사성과는 김씨의 ‘검은 돈’중 일부가 홍업씨에게 흘러들어갔다는 수사착수전의 추측이 현실화함을 의미했다. 이에 따라 조만간 홍업씨가 대검청사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어왔다.

그러나 이달 중순들어 수사의 열쇠를 쥔 김씨와 유씨가 홍업씨를 철처히 보호하는데다 기대를 모았던 계좌추적도 더 이상 진척을 보지 못하면서 수사는 지구전 양상으로 변모했다.

홍업씨 측도 “이제 지쳐서 못기다리겠다. 죄가 있으면 받을 테니 빨리 끝내고 싶다”며 역공을 취하기에 이르렀다. 청와대 등 여권에서도 “검찰의 장기수사는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는 취지의 불만을 표출했다.

마침내 월드컵을 일주일여 앞둔 23일 수사팀은 마침내 “월드컵 개막전 사건종결이 어려울 것 같다”고 털어놓기 시작했다. 수사장기화를 인정한 순간이었다.



검찰ㆍ홍업 모두에게 부담

검찰은 홍업씨 소환연기를 공식화하고 나서 차라리 홀가분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결코 검찰의 편일 수는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특검이 넘긴 사건을 석달간 주무르다 “아무것도 없더라”는 결론을 내놓기에는 검찰이 짊어져야 할 짐이 너무나 무겁다. 당장 한나라당에서 재특검 카드를 꺼낼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특검의 망령에서 이제 겨우 벗어나려는 검찰에게 재특검은 사약과 같은 존재다.

홍업씨도 마음이 편치않기는 마찬가지다. 홍업씨는 최근 몸무게가 7㎏이나 빠지는 통에 바지가 헐렁해졌다고 한다. 검찰은 월드컵 기간 중 홍업씨를 거친 1원 한푼까지도 뒤질 태세다.

온 국민이 월드컵 열기에 빠져있을 6월 한달간 검찰과 홍업씨는 그들만의 피말리는 싸움을 벌여야 한다. 이미 모래시계는 돌아가기 시작했다.

손석민 사회부 기자

입력시간 2002/05/31 20:34


손석민 사회부 herme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