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덫에 걸린 盧] 盧風아 다시 불어다오

안 뜨는 노무현, 발목잡힌 민주호…지방선거·재신임 등으로 딜레마

여야 대통령 후보 경선이 마무리돼 지자체 선거전에 돌입한 요즘 여의도에 있는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당사 분위기는 사뭇 대조적이다. 한나라당 당사는 대선 후보 경선 전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인적 구성이나 조직이 바뀐 것이 없어 대체로 순조롭게 업무가 돌아간다.

굳이 달라진 게 있다면 7층의 총재 집무실 앞에 걸려 있던 ‘총재실’이라는 간판 대신 ‘대통령 후보실’로 이름이 바뀐 것 뿐. 총재실 때의 보좌진들 면면도 거의 바뀌지 않고 그대로 승계됐다. 후보실 보다 작은 규모로 꾸며진 6층 대표 최고 위원실에 서청원 대표가 새 둥지를 틀고 들어온 게 그나마 바뀐 전부다. 당 업무의 흐름도 아직 서 대표가 아닌 이회창 후보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업무 분담에 혼선, 손발 안맞는 당무

민주당도 겉으론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예전 당 총재실로 쓰던 8층을 대통령 후보실로 꾸미고, 당 대표실이던 3층은 그대로 대표 최고 위원실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내부 분위기는 전 같지 않다.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달리 인적 구성이 판이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선 대통령 후보실에 노무현 후보가, 당 대표실에는 한화갑 대표 최고위원이 새 둥지를 틀었다. 동시에 보좌진들을 비롯한 당직자의 절반 가량이 새 얼굴로 바뀌었다. 새 수장들이 들어오면서 합류한 비서진과 기존의 당직자들이 한데 섞여 있다.

그래서인지 업무 분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차질을 빚을 때가 잦다. 실무자의 의견을 들으려 해도 “소관 업무가 아니다”, “담당자가 정해져 있지 않다”며 서로 떠넘기기 일쑤다. 민주당 내에는 이인제 고문을 비롯한 동교동계와 당내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던 후보들 인맥인 당직자들이 상당수 남아 있다.

이들이 노무현 후보와 한화갑 대표가 새로 데리고 들어온 비서진들과 한 데 섞여 다소의 혼선을 겪고 있는 것이다. 현재 당 운영은 기존 당직자들이, 언론ㆍ공보 등 외부 활동은 노무현 후보 출신들이 임시로 맡고 있다.


후보ㆍ당권분리 정치실험 한달

민주당이 5월 27일로 ‘대선 후보와 당권 분리’라는 새로운 정치적 실험을 통해 노무현 후보를 대선 주자로 확정된 지 꼭 한 달이 됐다. 하지만 흔들리는 민주호는 아직 바로 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한 가닥 희망으로 떠올랐던 노풍이 후보 확정과 동시에 가라앉으면서 다시 냉소적인 분위기가 스멀스멀 터져 나오고 있다. 민주당이 아직 노무현 체제로 완전히 근착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통령 아들 비리로 타격을 입어 당내 조직마저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 한화갑 대표는 “당내 팀 플레이가 안되고 일사불란하게 보이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며 당내 문제를 인정하면서 “그러나 이것은 새 리더십을 정착시켜 가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조만간 자리를 잡게 될 것”이라고 해명했다.

한 대표는 “민주당 전신인 평민당 시절에 김대중 총재를 중심으로 구심점이 형성돼 있으나 지금은 대표를 포함한 11명 최고위원 각자가 11분의 1의 권한만 갖는 횡적인 관계라 일사분란한 통제가 힘들다”며 “당은 후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 만큼 전 당직자가 노 후보를 최우선으로 하라고 지시했는데 노 후보가 그런 체질이 아니라 다소 혼선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민주당의 당면 과제는 코 앞으로 다가온 6ㆍ13지방 선거다. 특히 이번 지자체 선거는 대선 전초전의 의미가 짙게 배어 있다. 민주당은 지방선거와 대선을 연계하는 것을 애써 부정하고 있지만, 지방선거 결과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민주당의 문제는 곧 노무현 후보의 문제다. 특히 노무현 후보는 대선 경선 기간 중 “6ㆍ13지방선거에서 부산 경남 울산 단체장 선거에서 한 곳이라도 당선시키지 못하면 대선 후보 재신임을 받겠다”고 공언한 터라 지방 선거에 거는 마음 가짐은 남다르다.

노 후보는 주간한국을 비롯한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줄곧 이 공약을 지킬 것임을 수 차례 다짐했다. 그리고 이변이 생기지 않는 한 노 후보는 후보 재신임을 받아야 할 공산이 크다.


영남권 열세, 재신임 문제 족쇄 될 수도

현재 지방선거, 특히 영남권에서 민주당은 상당한 열세에 있다. 노 후보가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부산에서는 한나라당 안상영 후보가 민주당 한이헌 후보를 크게 앞서고 있다. 경남에서도 한나라당의 김혁규 현 도지사가 50%가 넘는 압도적 우세로 노무현 후보가 미는 김두관 전 남해군수를 따돌리고 있다.

울산에서는 인권 변호사인 송철호 민노당 후보가 한나라당 박맹우 후보를 제치고 선두 굳히기에 들어갔다. 노 후보는 당초 울산에서는 송철호 변호사를, 부산에는 YS의 심복인 박종웅 한나라당 의원이나 문재인 변호사를 민주당 후보로 내보낼 생각이었다.

두 후보가 나갈 경우 실제로 당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노 후보로서는 별 고민 없이 후보 재신임이라는 부담되는 공약을 걸 수 있었다.

그러나 두 곳에서 당초 예상했던 후보 공천에 차질을 빚으면서 노 후보의 대선 후보 재신임 공약은 이제 노 후보 자신은 물론이고, 민주당의 발목을 잡고 있다. 지금 현재 상황에서 노 후보가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부산에서 질 경우 노 후보는 대선 후보 재신임을 받아야 한다.

민주당이 노 후보의 대선 후보 재신임을 한다고 할 경우라도 현재 마땅한 대안이 없어 노 후보를 재신임 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럴 경우 민주당은 물론 노무현 후보는 대선 과정에서 적지않은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아직 경선의 앙금이 풀리지 않은 이인제 의원을 비롯해 당내 비토 세력들과 야당으로부터 ‘형식적 재신임’을 비난 받으며 후보 사퇴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당 우왕좌왕, 노 후보 발만 동동

이런 당 안팎의 문제로 민주당은 지방선거를 눈 앞에 두고도 갈피를 못 잡은 채 방황하고 있다. 이번 지방선거부터 공식적으로 노무현 후보 간판을 달고 가자니 자칫 재신임 문제로 노 후보가 타격을 받을 것이 걱정되고, 그렇다고 정돈 안된 현재의 당 체제로 선거를 치르자니 패배가 눈앞에 보이고, 그야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최근 노 후보 중심 체제로 지방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의견이 많지만 아직 조직이나 역할 분담이 제대로 안돼 있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이로 인해 민주당 일부에서는 비공식적으로 지방선거를 포기하고 대선에 초점을 맞추자는 주장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5월 23일 있었던 민주당 의원 워크숍에서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서는 “6ㆍ13지방선거 패배가 오히려 대선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주장까지 나와 논란을 빚었다.

워크숍 경제1분과 토론에서 국회 원 구성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한 의원은 “민주당은 정치개혁을 중시한다는 면모를 보여줘 불리하더라도 현재 한나라당 원 구성 요구에 응해야 한다”며 “이런 모습을 보여 준다면 지방선거에서 지더라도 국민들에게 동정론이 확산돼 대선에서 이길 수 있다”며 ‘동정론’을 폈다.

이에 대해 당 관계자들은 “노 후보 캠프 내에서도 이런 식의 논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는 패배주의적 인식이 당 전반에 확산되고 있는 반증으로 당이 서둘러 조치해야 한다”고 진화에 나섰다. 이 자리에 참석한 다수의 당 관계자들은 “총력을 다해 지방선거를 준비해도 모자라는 판에 이런 발언이 나오는 것은 무책임한 처사”라며 분개했다.


충청권 동요 심각, 중부권 신당론도

민주당의 내부 동요는 영남 뿐 아니라 충청권에서도 심각하다. 당내 경선에서 이인제 의원의 도중 패퇴로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한 민주당내 충청권 의원들은 최근 노풍이 잠잠해지면서 불만의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민주당의 홍재형(청주 상당) 의원은 5월 24일 “비례대표 도의원 후보 선출에서 여성 우대, 호남고속철도 오송 분기점 유치 지원 등 3개 항이 관철되지 않으면 탈당하겠다”며 배수의 진을 쳤다. 충청권 의원들은 “현재 상태에서는 민주당이 충청권에서 발을 붙이기 힘들다”며 당내에서 충청권에 대한 배려를 촉구했다.

송석찬 의원을 비롯한 충청권 일부 의원들은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 이인제 고문을 주축으로 한 중부권 신당 창당까지 거론하고 있다.

민주당은 이런 당면 과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노무현 돌풍’에 기대는 것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다는 자체 판단을 내리고 있다. 민주당은 당 지지도 추락의 원인이 대통령 아들 문제를 포함한 각종 권력형 비리에 있다는 데 이견이 없다.

따라서 DJ를 포함한 기존 민주당의 이미지를 단절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개혁성이 강한 노 후보 중심으로 당을 일신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한마디로 기존의 민주당이 아닌, 사실상 ‘노무현의 당’으로 거듭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변화와 개혁을 원하는 국민들을 끌어 안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지방선거 후 노 후보 중심으로 당 정비

한화갑 민주당 대표는 “지자체 선거는 당 중심체제로 가고 지방 선거가 끝나면 무조건 노 후보 중심 체제로 갈 것”이라며 “노 후보 당선을 위해 필요하면 모든 것을 해야 한다.

후보가 당선 돼야 우리가 여당이 되고 그 다음에 감투도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주당 쇄신파 의원들도 “노무현의 개혁 노선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제도적ㆍ정치적 틀을 가진 당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노 후보와 투톱 체제를 이루는 한화갑 대표가 이처럼 당의 변신 시점을 지방선거 이후로 못박은 것은 지방선거의 결과가 노 후보의 운신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내부적으론 노 후보 중심으로 지방선거를 치르지만, 만약의 상태에 대비해 당 차원에서 최대한 노 후보를 보호하자는 포석이 깔려 있다.

만약 지방선거를 노 후보 중심으로 갔다가 패했을 경우 후보 재신임 과정에서 노 후보가 안팎으로 지방선거 책임 공세에 시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노 후보가 당의 전면에 나오지 못함에 따라 민주당 고위 당직자들은 당과 후보간에 내분이 있는 것처럼 보여지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따라서 민주당에선 요즘 당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노 후보의 개혁 노선을 쫓아가는 제2의 당 쇄신 운동을 벌이자는 공감대가 형성돼 가고 있다. ‘중앙당 폐지’, ‘월드컵 이후 중립 거국내각 수립’, ‘아태재단 해체’ 등의 강도 높은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6ㆍ13 지방선거도 중요하지만 민주당이 사느냐 죽느냐는 12월 대통령 선거에 달려 있고, 그 중심에 노무현 후보가 있다”며 “앞으로 민주당은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노풍 살리기에 당의 사활을 걸 생각”이라고 말했다.

유종필 민주당 대통령후보 공보 특보는 “이번 지자체 선거에서 영남 지역 광역자체 단체장 중에서 한명도 당선시키지 못할 경우 후보 재신임을 받겠다는 공약을 한 것은 노 후보가 자신의 출신지인 영남지역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의미가 강했다”며 “물론 당선이 목표지만 설사 당선이 안 된다 하더라도 이곳에서 30~40% 정도의 득표만 올린다면 그것은 절반 이상의 성공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 특보는 “일부에선 후보 재신임이 손해가 될 것이라고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노 후보의 신뢰감과 정직성을 보여주게 돼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계 일각에서는 노 후보가 지방선거라는 덫에 발목이 걸렸으며 지방 선거 이후에도 노 후보가 운신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송영웅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2/05/31 20:42


송영웅 주간한국부 heroso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