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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LP여행] 김씨스터즈(下)

 아메리칸 드림 꽃피운 라스베이거스의 여왕

고국에 대한 그리움에 지쳐있던 재미 교포들은 김씨스터즈의 민요가락에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향수를 달랬다. 당시 정상급 가수들의 무대이자 인기보증 수표였던 미국 최고의 인기TV 프로그램 <에드 셜리반 쇼> 출연은 기적이었다. 동양인이 미국 가요를 부르는 이색적인 무대는 커다란 호기심을 유발시켰다.

TV 출연 후 에픽 레코드에서 음반제작 의뢰가 들어왔다. 첫 음반을 받아 들자 세 자매는 울음보가 터져 버렸다. <찰리 브라운>등 수록곡들이 대히트를 터트리자 <딘 마틴 쇼><할리우드 쇼>등 인기 프로그램에서 앞다투어 출연제의 경쟁을 벌어져 수입도 천정부지로 올랐다.

김씨스터즈는 도미 1년 만에 아메리칸 드림을 일궈냈다. 미국 전역의 1급 호텔 클럽에서 출연제의가 빗발치고 <셜리번 쇼> TV에도 33회나 출연했을 만큼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인기 배우 커크 더글러스와 존 F 케네디 미국대통령의 어머니는 골수팬이었다.

세계적인 명사와의 만남 장면은 외신을 타고 전 세계에 타전되었다. 이들의 성공에 고무된 L.K.L레코드사는 미국에서 데뷔음반을 공수해 원판을 카피하여 <김시스터즈 첫 앨범>을 발매했다.

성공한 딸들은 1963년 어머니 이난영과 남동생들을 라스베가스로 초청해 5년 만에 재회했다. 형제들은 누이들의 주선으로 김브라더스를 결성하며 미국에 눌러 앉았다.

이난영은 프랑크 시나트라, 에디 피셔 등 인기절정의 당대 미국 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딸들의 인기를 확인하곤 북받쳐 오르는 감격에 오열했다. 1963년 딸들의 활약을 담은 ‘영상필름’을 가져와 KBS TV에 소개해 소문으로만 접했던 김씨스터즈의 활약을 확인 시켜주었다.

그러나 이난영은 납북으로 생이별한 남편 김해송과 연인이었던 서정가요의 제왕 남인수가 잠들어 있는 고국 땅을 떠날 수 없었다. 적응키 힘든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홀로 귀국했지만 1965년 9월 11일 알코올 중독으로 쓸쓸하게 세상을 등졌다. 어머니의 사망 소식에 세 자매는 망연자실했지만 빡빡한 스케줄은 장례식에도 참석 못하는 불효의 한을 남겼다.

1966년 유명 사회자 봅 호프와 함께 미국정부의 평화사절단으로 베트남을 방문해 1만5,000명의 참전 미군들을 위한 위문공연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또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순회공연에서도 박수갈채와 장미세례까지 받자 평론가들은 미국 최고의 흑인여자 보컬 트리오 <스프림즈>와 같은 서열로 김씨스터즈를 평가했다.

정부에서도 한미우의를 증진시키고 문화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해낸 이들의 공로를 인정, 정부 감사장을 수여했다. 유명세는 엄청난 부를 동반시켰다. 미국 진출 10년 만에 김씨스터즈는 18인조의 개인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 푸에르토 리코에 자신들의 호텔 나이트클럽을 소유, 연간 고액납세자 6위에 오르며 라스베가스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성공을 위해 데이트마저 자제했던 세 자매는 1967년 초 줄줄이 국제결혼으로 가정을 이뤘다. 안정을 찾게 되자 1970년 5월 고국을 떠난 지 12년 만에 첫 귀국길이 열렸다. 고국 팬들을 위한 공연도 중요했지만 5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소 참배가 절실했다.

숙소인 조선호텔 15층 특별실에서 본 서울은 전쟁의 포탄에 파괴된 암울한 회색도시가 아닌 재건의 활기가 용솟음치는 모습이었다. 시민회관에서 열린 4일간의 귀국공연은 금의환향의 무대였다. <아리랑><찰리 브라운> 등 20여곡의 개막공연 레퍼토리에 3,000여 팬들은 열광했다.

특히 어머니 고 이난영의 히트곡 <목포를 눈물>을 흐느끼며 부를 땐 객석 또한 울음바다로 화답했다. 실황공연은 MBC TV에서 2시간동안 녹화 방송되었고 신진레코드에서는 2장의 음반으로 발매 됐다. 장안은 온통 김씨즈터즈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1973년 막내 민자가 임신등 결혼생활 문제로 팀을 탈퇴하자 큰 언니 영자가 다시 합류했다. 이후 1975년, 1980년 5년 터울로 2번의 성공적인 내한공연을 했다. 1982년 큰언니 영자가 활동을 중단하면서 숙자,애자, 영일, 태성 등 남매는 4인조 혼성팀 김<시스터즈&브라더스>로 팀을 통합했다.

그러나 팀의 재롱동이 애자가 이혼의 아픔에 좌절하며 도박에 빠져 빈번하게 공연을 펑크내자 팀에서 쫓겨나는 아픔을 겪었다. 쫓겨난 애자는 LA를 전전하며 여공생활을 했을 만큼 정신적으로 황폐한 삶을 살다 1987년 폐암으로 쓸쓸하게 세상을 등졌다.

10년 후 1990년 이들은 3인조 <수.킴.앤.김브라더스>로 내한공연을 펼쳐 공연수익금 일체를 낙도어린이 돕기 기금으로 쾌척하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최초의 수출1호 보컬그룹으로 동서양을 조화시킨 독특한 무대매너와 연주를 곁들인 화려한 무대로 전 세계에 한국대중가요의 위상을 끌어 올렸던 김씨스터즈.

그들은 전쟁으로 황폐화된 우리사회에 대중가요의 르네상스 시대를 활짝 연 최초의 미8군 가수로 기억될 것이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2002/06/06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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