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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데이트] '명성황후' 최명길

[스타 데이트] '명성황후' 최명길

 "인생의 의미를 느끼고 연기의 깊이를 알것 같아요"

“명성황후를 연기하면서 한ㆍ일 월드컵을 맞는 심정이 남달라요. 다른 나라에 의해 왜곡된 역사를 우리가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이 시기에 다시 한 번 명성황후를 재조명해봤으면 합니다.”

서울 여의도 KBS 2 TV ‘명성황후’에서 명성황후로 열연중인 최명길(40)은 무척 차분하고 이지적인 이미지로 시청자들에게 어필하고 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실려 전해지는 또렷한 발음과 억양은 신뢰감을 준다.

‘한중록’ ‘용의 눈물’에 이어 ‘명성황후’까지 왕비 역할과 유난히 인연이 깊은 그는 현실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다. 자부심이 느껴졌다. “어떤 분이 ‘구원 투수’라고 표현하더군요. 제가 문근영 이미연에 이어 3대 명성황후를 맡지 않았다면 드라마가 종영될 수도 있던 상황이었으니까요. 사명의식을 갖고 임하고 있어요.”

드라마의 방영 중간에 투입됐다는 ‘부담’이 있지만, 그는 명성황후와의 깊은 인연으로 받아들인다. 사실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에 그는 명성황후 타이틀 롤을 제의 받았다. 하지만 당시는 고사할 수 밖에 없었다. 둘째 무진을 임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자신에게 명성황후 역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왔을 때 그는 “자신을 꼭 필요로 하는 배역”이라는 마음에 흔쾌히 출연을 결정했다.


홍릉 찾았을 때 명성황후의 한 느껴져

최명길은 얼마 전 ‘명성황후’팀의 이진우 김보미 등 출연진과 함께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명성황후와 고종의 합장릉인 ‘홍릉’을 찾아갔다. 제를 올리면서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명성황후가 살해됐을 당시의 얘기를 다시 듣고 묘소를 바라보는 것은 큰 슬픔이었다. “일본의 만행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더군요. 동시에 우리의 국모를 스스로 지키지 못한 한(恨) 맺힌 역사가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쇠락해가는 조선 왕조의 최대 격동기를 그리고 있는 드라마에서 최명길은 외세에 맞선 ‘철의 여인’ 명성황후를 실감나게 연기하고 있다. 그는 명성황후를 ‘비운’의 여인이라고 말한다. 다른 시대의 왕비는 왕을 보좌하는 내명부의 소임을 다하는데 그쳤으나 명성황후는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국운은 기울었고, 왕의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명성황후가 대외적으로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풀이한다. 한마디 한마디 대사를 할 때마다 명성황후의 뼈아픈 심경이 그 안에서 되살아난다. 특히 최명길이 명성황후로 투혼의 연기를 보여주는 데는 각별한 이유가 있다. 그의 남편인 김한길(49) 전 문화부장관의 영향이다.

“정치적인 대사가 매우 많아요. 가까이 있는 사람이 정치적인 곳에 있으니까 자연히 의미가 예사롭지 않을 수 밖에요. 가끔 혼자서 웃을 때가 있죠. 그 대사의 의미를 저만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배우가 또 있을까 싶어서….” 정치인의 아내로서 삶이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저 “남들이 안 하는 거 많이 하는 편”이라고 답한다.

볼수록 우아하고 편안한 매력을 주는 최명길이 연예계에 데뷔한 것은 열 아홉살이던 1981년. MBC 공채 13기로 시작, ‘성난 눈동자’에서 신인으로서 당돌하리 만큼 차분하고 진지한 연기를 펼쳐 단번에 유망 신인기대주로 성장했다. 이후 ‘설중매’ ‘도시의 얼굴’ 등 여러 드라마에서 깔끔한 연기력으로 정상급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그의 진가가 먼저 발휘된 곳은 ‘영화’였다. 86년 이영하와 함께 출연한 영화 ‘안개기둥’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주목 받기 시작했다. 김홍준 감독의 ‘장미빛 인생’(1994년)은 그의 연기 인생에서 빼놓을 없는 작품이다.

80년대 도시 빈민의 삶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만화방 여주인으로 분해 백상예술대상과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또한 이 작품으로 프랑스 낭트 영화제에서도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 세계 무대에서 탁월한 연기력을 인정 받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이렇듯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는 그가 20년이 넘는 연기 생활 동안 단 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나라 영화계가 양적으론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면서도 내용이나 소재의 개발엔 등한시했던 현실을 반영한다.

특히 중년 여배우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은 극히 한정돼 있다. “외국 배우들을 보면 제 나이에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 수 있는 여건을 가진 것 같아요. 참 부럽죠.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완성도 높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우리나라에서도 중년 배우들이 다양한 배역을 맡을 수 있는 풍토가 조성돼야 해외에서도 이름을 떨치는 배우들이 많이 나올 텐데. 아쉬워요.”

최명길은 1990년대 초엔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로도 큰 인기를 모았다. ‘최명길의 음악살롱’ ‘음악이 있는 곳에’ 등의 DJ를 맡아 예의 편안한 진행으로 청취자들에게 참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라디오 방송을 통해 김 전 장관을 처음 만나 결혼까지 이르렀다.


남편은 가장 든든한 후원자

결혼은 최명길은의 연기 생활에 큰 전환점이 됐다. 연기 스타일이 크게 변했다거나, 김 전 장관이 그의 연기 생활에 깊이 관여했던 것은 아니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는 과정이 진솔한 삶 자체에서 묻어나는 원숙한 연기를 가르쳐주었다. 행복한 가정 생활 자체가 연기의 훌륭한 스승이 된 셈이다.

남편은 언제나 “연기는 워낙 당신이 잘 하는 분야니까”라며 격려해주는 든든한 후원자다. 드라마를 함께 보면서 모니터도 해준다. 가장 고마운 점은 “늦게 들어오는 아내의 고충을 말없이 이해해주는 것”이라고 최명길은 말한다.

촬영이 없는 날에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동네 공원도 가고 외식도 즐긴다. 어진(5살), 무진(8개월) 두 아들을 둔 덕에 팽이치기도 하고 축구도 한다. “아들을 키우느라 전에 해보지 못한 놀이를 많이 경험”한다며 그는 환한 웃음을 짓는다.

드라마가 끝난 뒤의 계획을 물었더니 “명성황후라는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다음 작품은 보다 신중하게 선택”할 생각이라고 말한다. 반드시 이런 작품을 하겠다는 욕심은 없다.

자기의 방식만을 고집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연스럽게 녹아 드는 연기자이고 싶다. “물 같은 연기자”라는 평가를 특히 좋아한다는 그는 “앞으로도 무리하지 않고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배우로 남겠다”고 강조했다.

배현정 기자 hjbae@hk.co.kr

입력시간 2002/06/06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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