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아편이다"

국민 하나로 묶는 정치도구로 이용, 체제 불안국가 일수록 심해

모든 스포츠 가운데 축구만큼 정치와 밀접한 관련이있는 경기도 드물 것이다. 나치와 파시스트가 민족주의를 불어 넣어체제를 공고히 하는 도구로 활용할 때 축구는 독재의 유호한 수단이었다.

종교를 아편이라 했던 마르크스를 빗대어 축구 여시 아편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하지만 때로 축구는 가난과 부정에 항의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지금 아르헨티나의 모습이 그렇다.

영국 경제일간지 파인낸셜 타임스와 주감 옵서버지에 고정으로 글을 쓰며 '적과 맞서는 축구'라는 책을 쓴 자유기고가 시몬 쿠퍼가 뉴욕 타임스 매거진 호신호에 실은 '월드컵은 단순히 게임이 아니다'는 글을 요약해 소개한다. 축구와 정치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풍부한 사례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알 카에다 "9·11테러는 축구 이긴 기분"

9·11테러의 배후로 지목디고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은 1994년 초 3개월 동안 런던에 머물면서 자신의 지지자들과은행원들을 방문했다 더불어 그는 영국의 유명 프로축구 구단인 아스날의 경기를 지켜보기 위해 경기장을 4번이나 찾았다.

사우디 아라비아로 추방당하기 전까지 수단에 머무는 동안 그는 축구 클럽 기념품 가게에서 아들들을 위한 선물을 샀다. 빈 라덴은 친구들에게 축구 팬만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런 경향은 빈라덴이 이끄는 국제 터러 조직인 알 카에다도 마찬가지다. 미국 국방부가 지난 해 공개한 빈 라덴과 알 카에다가 등장하는 비디오 케이프에는 축구에 대한 언급이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빈 라덴의 추종자들이 빈 라덴에게 1년 전 했던 축구 이야기를 그가 회상하는 대목이다.

"나는 꿈에서 우리가 미국인을 적수로 축구 경기하는 것을 보았다. 필드에 모습을 나타낸 우리 선수들은모두 조종사들이었다." 알 카에다는 그 경기에서 이겼다.

같은 테이프에서 또 다른 알 카에다 조직원은 세계무역센터 공격 장면을 담은 TV방송을 지켜보는 모습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 장면은 이집트인 가족이 거실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들은 기쁨에 넘쳤다. 축구 경기에서 당신 팀이 이겼을 때 기분이 어떤가? 바로 그런 기쁨이다."

빈 라덴과 그의 추종자들은축구에 대한 한 가지 진실을 짚어내고 있다. 미국에서야 축구는 아이들을 위한 평범한 운동 경기에 지나지 않지만 다른 나라들에서 축구는 전쟁 아니면비길 데 없는집단 열정 제조기다. 그리고 그 때문에 축구는 다른 어떤 문화현상과도 다른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독재의수단이며 혁명의 방편

축구는 독재의 수단이며 혁명의 방편도 된다. 전제 정치의 상징이면서 무정부주의의 심볼이다. 축구를 통해 대통령을 내쫓기도 하고 뽑기도 하나. 사람들이 조국에 대해 좋거나 나쁜 어느 쪽으로 생각하는 방식도 축구를 통해 규정된다.

유럽 우파 돌풍의 한 축인 실비오 메를루스코니 이탈리아 현 총리는 1986년 당시 뇌물 스캔들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던 프로 축구팀 AC밀란 을 인수해 3년 만에 유럽 챔피언 구단으로 만들었다.

이후 베를루스코니는 축구 응원가에서 따와 '포르자(전진) 이탈리아당'을 창당했고 자당의 후보들을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의 별칭으로 블루스라는 뜻인 '아주리'라고 불렀다. 베를루스코니는 1994년 총리에 선출됐다.

오스트리아의 극우 정치인인 외르크하이더 역시 축구 클럽인 FC쾨른텐을 운영하는 친근한 사람으로서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브라질의 정치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 클럽의 셔츠를 입고 선거 캠페인에 나서는 것이 보통이다.

이달 치러진 영국 지방선거에서 첫 시장선거 결과가 나온 하틀풀에서는 집권 노동당 후보가 칼락하고 대신 지역 축구팀의 마스코트인 원숭이를 새긴 옷을 입고 선거 운동을 벌인 후보가 당선했다.

축구와 정치의 상호 작용이 어디보다 뚜렷한 곳은 아르헨티나다. 역대 월드컵에서도 프랑스와 함께 유력 우승 후보인 아르헨티나는 지금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을 연상케 하는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올 초부터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한 아르헨티나 경제 때문에 전국에서 연일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한가지 패션이 생겨났다 시위대들은 등에 '바스타'(충분해)라는 글자를 새긴 아르헨티나 국가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시위에 나섰다. 아르헨티나 축구팀의 마지막 영광을 상징하는 이 패션을 시위대는 집권 체제를 모욕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민족주의 불러일으키기 위한 도구

아르헨티나 축구 대표팀이 지금은 불복종의 표상으로 여겨지고 있다면 아르헨티나가 월드컵에서 우승했던 1978년에 군부 독재정권은 축구를 민족주의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고문의 상처와 반테제 인사 수천 명이 실종했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잊도록 만드는 장치였다.

그 해 울드컵 결승전이 열리던 날 밤 교도관들은 정치범인 그라시엘라 다레오를 차에 태우고 월드컵 열기로 들떠 있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내로 향했다. 달리던 차에서 목을 내놓고 그는 "도와주세요, 납치됐어요"라고 소리쳤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엔시소라는 이름의 전직 아르헨티나 군 장성은 그날을 회상하면서 "나라 전부가 거리로 나와 있었다. 급진주의자들은 페론주의자(민족주의와 노동자 우선정책을앞세운 아르헨티나의 인기 영합형 정치 이념 지지자)들을 부둥켜 안았고 가톨릭 교도들은 기독교인과 유대인들과 함께 팔짱을 꼈다.

모두 한 가지 깃발만 흔들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는 4년뒤 영국과의 포클랜드 전쟁때 재연되었다. 그때 거리에는 월드컵 공식가인 '바모스 바모스(전진) 아르헨티나'가 넘실거렸다.

이번 월드컵 대회에 참가한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심정은 그때와 가을지도 모른다. 월드컵에서 우승하면 아르헨티나에 희망이 돌아올 것이라는 분위기다. 최근 몇 년 동안 필드에 나서면서 그들은 교사나 아르헨티나 항공 직원들, 또 다른 이유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깃발을 손에 쥐었다.

수비수 자비에르 자네티는 결식 아동들의 집을 열었다. 공격수 클라우디오 로페즈는 "우리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위해 월드컵에서 우승하기를 원한다. 선수들에 앞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팀의 유니폼이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국민에게 기쁨을 주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은 모두 좌파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유일한 축구단이다.

김범수 기자

입력시간 2002/06/07 11:06


김범수 bski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