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울산은 勞風이다

노동자 표심이 당락 좌우, 근로자 권익과 땀 재평가 의지 담긴 바람

‘울산의 노풍(勞風ㆍ노동자 바람)을 잡아라.’

울산에서 처음으로 2002년 한일 월드컵대회 경기가 열린 6월 1일 토요일 오후. 그 시간 이회창 한나라 당 대선후보는 주말을 맞아 인파가 몰리는 울산 남구 롯데 백화점 광장에 이어 북구 화봉 공원 등을 잇따라 방문, 정당 지원 연설을 벌이며 울산 지역 주민들의 뜨거운 지지를 호소했다.

자신의 67회 생일을 하루 앞두고 이회창 후보가 선거전 첫 주말 0순위 지원 지역으로 울산을 선택해 방문한 데는 남다른 배경이 있다. 연말 대선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영남권 전역의 광역 단체장 선거의 승리라는 기대와 달리 최근 이상기류의 발원지가 바로 울산으로 이번 선거의 최대 변수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울산은 송철호 민주노동당 시장후보가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맹우 한나라당 후보를 평균 7~10% 정도 앞설 뿐 아니라 5개 기초단체장 선거 역시 민노당과 무소속의 기세가 높아 이곳에서 패할 경우 이 후보로서는 영남권 수성(守城)에 막대한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결국 울산엔 노풍(盧風)이 아닌 노풍(勞風)이 최대의 변수로, 그 표심이 어디로 쏠릴 것인가에 따라 마지막 카드의 패가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 유권자 90%가 근로자

6월 3일 오후 울산 동구 방어진의 현대중공업 정문 앞. 퇴근시간이 가까워 오자 ‘기호 1번 XXX 울산시장 △△△당 후보’라고 씌어진 파란색 어깨 띠를 한 30ㆍ40대 ‘아줌마’ 부대 40여명이 회사 정문 앞 좌우 양편으로 도열한 채 선거대책본부 관계자로 보이는 한 남자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하나 둘 회색 작업복 차림의 근로자들이 정문을 빠져 나오는 모습이 눈에 띠기가 무섭게 그들은 일제히 허리를 90도로 숙인 채 “열심히 하겠습니다!” 를 반복해 외쳤다. 그러나 정작 인사를 받는 근로자들의 반응은 경상도인의 무뚝뚝함 마냥 그저 냉랭하기만 할 뿐이다.

우리나라 공업의 심장부로 자동차와 철강산업의 메카인 울산에는 지방선거전 초반부터 각 당 지방단체장 후보들의 ‘노풍(盧風)’아닌 ‘노풍(勞風)’ 끌어안기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현대자동차 및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하이스코(현대강관), 한국프랜디, 세종공업 등 울산공단에 근무하는 직원(정규ㆍ비정규직) 수만도 36만 여 명(정규ㆍ비정규 직)으로 이들의 가족을 포함할 경우 울산 전체 유권자의 90%를 차지한다. 따라서 울산지역 노동자들의 표심이 후보의 당락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노동자 세력도 시대 변화에 따라 다양해져 민주화 열기가 한창이던 1980년대와 같은 단일 노선의 정치이념을 추구한다고 보면 큰 오해이다. 근로자의 성향과 봉급수준, 정규ㆍ비정규 직원 구분에 따른 정치적 성향과 의식은 뿌리만 같을 뿐 여러 개의 가지로 갈라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응순(40) 민주노동당 울산지역 선대본부 대변인은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한창이던 4월까지 노무현 바람이 전국적으로 불 때 노풍(盧風)은 대세였지만 지금 ‘노풍’의 실체는 노무현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바람으로 이곳 노동자들 사이에는 곧 노동자 바람(勞風)”이라고 말했다.

결국 울산에 불고 있는 ‘노풍’은 정치인 개인의 바람이 아닌 전체적인 노동자의 권익과 실리추구를 위해 구체적인 근로환경 개선 및 근로자 삶의 향상에 보다 근접해 있다는 의미다.


산업화 40년에 대한 재조명

울산의 ‘노풍’은 또 지난 40년간 울산의 산업화를 재조명하고 근로자 중심의 정치 변화와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역사적 소명감까지 담고있다.

이재인 민주노총 울산본부 정치위원장은 “40년간 울산의 산업화와 국가경제의 발전을 밀고 온 힘은 땀 흘려 일하는 많은 노동자 임에도 울산의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해 온 주체는 산업화를 추진한 개발자 중심의 정책으로 일관돼왔다”며 “이젠 지역주의에 기생해 권력을 유지해온 보수기득권 세력을 진보 세력으로의 대체할 시기가 왔다”고 주장했다.

적극적인 현실 정치참여의 자세로 옷을 갈아입은 대표적 노동운동 단체인 민주노총의 새로운 자리 메김도 이번 울산 지방선거에서 찾아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여기에다 시민운동과 진보정당 운동이 울산 ‘노풍’의 주체로 참여하면서 노동운동을 포함 3자 연대의 결속력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장태원 울산환경운동연합 의장은 “지난 20년간 울산의 민주화 세력은 일방적인 성장위주의 도시발전에 줄기차게 문제 제기를 해왔다”며 “산업화가 진전된 만큼 공해추방운동과 노동운동, 시민운동, 진보정당운동도 동시에 성장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울산이 지향하는 이 같은 정치개혁 바람에는 경실련을 비롯해 시민연대와 환경운동연합 등 1987년 현대중공업 파업 당시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범 재야권이 15년 만에 다시 뭉쳤다는 점 역시 이번 울산 지방선거전의 판세를 가늠하는데 있어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같이 울산에 불고 있는 ‘노풍’의 눈으로 떠오른 민노당 송철호 시장후보는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의 조합원 총회를 통해 선출된 진정한 노동자 대표후보로 평가 받으며 각종 여론조사에서 우위를 점유하고 있다.

송 후보는 “시장의 당락을 떠나 우선적으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면서 노동자 표심 다지기에 나서고 있다. 최근 그는 직접 민노총 각 사업장의 임단투 출정식에 참석하는 등 노동현장 순회방문활동을 통해 ‘후보 얼굴 보기가 힘들다’는 노동계 일부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진보정당의 꿈, 현실화 가능성 높아

한나라당의 반격도 만만찮다. 박맹우 한나라당 시장후보는 최근 필승 결의대회에서 “노동자들이 정당한 권익을 제대로 보호 받기 위해서는 전국 정당이자 수권정당인 한나라당을 지지해야 한다”며 노동자층 지지세 확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박 후보측은 노동자 수가 많은 현대자동차 등 대규모 사업장내 당원배가 및 지지 층 확산에 주력하는 한편 캠프 내에 전 노조간부 출신을 일부 포진 시키는 등 노동계층에서의 열세를 최소화하기위해 주력하고 있다.

한편 ‘진짜 노동자 후보’임을 강조하는 사회당 안승천 시장후보는 정당기반과 지지도 등의 열세로 언론보도에서 소외되고 있는 부분을 만회하기 위해 울산지역의 버스노조와 해고근로자 문제 등 현장에서의 투쟁에 동참하는 등 현장중심의 활동에 안간힘을 쏟고있다.

안 후보는 해고자ㆍ비 정규직ㆍ산재문제 등 현실노동문제에 대한 각 후보진영의 정책과 대안 검증을 요구하며 3명의 시장후보가 참여하는 노동정책토론회를 제안하는 등 노동계 공략에 열중하고 있다.

울산 정당 관계자들은 6월 6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기초단체장 후보자 합동연설회가 최근 월드컵 대회 열기에다 초여름 더위 등에 따라 자발적으로 참석하는 일반 유권자가 유례없이 적고, 각 후보측의 동원 청중이 대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특히 각 후보측에서 유세장의 지지분위기를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청중을 동원하면서 금품을 제공할 개연성에 바짝 긴장하는 분위기다. 한 정당관계자는 “이번 선거전에서 가장 우려하고 있는 것은 대선바람과 금권선거를 통한 물레방아 역풍”이라며 “선거전 초반인 최근 울주군의 한 동네에선 선거운동을 위해 하루 5,000만원을 쏟아 부은 후보가 있을 정도”라고 우려감을 표시했다.

선거전이 중반을 향해 치달을수록 울산에서는 과연 새로운 진보정당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을지 ‘노풍’의 힘을 주목한다.

울산=장학만기자

입력시간 2002/06/07 19:05


울산=장학만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