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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의 힘] 불·탈법으로 얼룩지는 지방선거

유권자의 매운 맛이 묘약이다

서울 도봉구선관위의 김모 계장은 벌써 2주 넘게 밤 2~3시께 귀가하는 강행군을 하고 있다. 불법 선거운동을 적발하려고 현장을 다니다 보면 끼니를 거르기 일쑤다.

얼마 전 김 계장은 모지구당 위원장의 진갑 잔치에 채증 하는 과정에서 폭행까지 당해 당사자를 선거관리 침해 혐의로 고발 조치하기도 했다. 선거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위법행위가 늘어나면서 김 계장은 모자라는 일손 때문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6월 13일 치러지는 제3회 전국동시 지방선거가 금품 살포, 공무원 줄세우기, 비방ㆍ흑색 선전, 중앙당의 개입 의혹 등 전에 없는 혼탁상을 빚고 있다. 이같이 유례없는 극심한 불법과 타락으로 선거가 얼룩지면서 ‘지방자치 행정의 활성화’라는 당초 입법 취지마저 크게 퇴색하고 있다.

이번 지방 선거가 지난 1,2회 지방선거와 달리 초반부터 과열 양상을 보이는 것은 후보자와 민심 간의 괴리가 그 어느 선거 때보다 크기 때문이다. 최근 대통령 아들 구속 등 권력형 비리가 잇달아 폭로되면서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인식은 ‘무관심’의 수준을 넘어 ‘정치 혐오’의 단계에 도달해 있다.

여기에 월드컵이라는 국가적 대사가 열리면서 국민들은 선거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지방선거에 투표 하겠다’는 의사를 보인 유권자는 42.7%에 불과했다.

이는 1998년 제2회 지방선거의 투표율 52.7%에도 못 미치는 저조한 수준이다. 일반적으로 투표율은 여론조사가 보다 낮은 것이 관례라 선거 전문가들이 자칫하면 30%대투표율에 머무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대선 전초전 인식, 각당 사활 건 유세전

반면 정당을 비롯한 후보자들의 선거 열기는 뜨겁게 달아 올라 있다. 특히 정치권은 이번 선거가 대선 6개월 전에 열리는 사실상의 대선 전초전으로 간주하고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8월 국회의원 보선과 12월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하부 세포 조직이라 할 수 있는 지방 선거의 승리가 필수 요건이다.

더구나 이번 선거는 정당 명부 비례대표제가 처음 도입됨에 따라 군소 정당 후보들까지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실제로 여야 각 당의 대통령 후보들은 전략 지역에 유세 지원 강행군을 펴며 사실상의 대선 대리 전을 방불케 하는 유세 전을 펼치고 있다.

지난 2차례의 지방선거는 많은 선거구와 후보자 수에도 불구하고 총선이나 대선에 비해 비교적 조용히 치러졌다. 제1회 지방선거는 김영삼 전대통령의 임기 중반인 1995년 6월에 실시됐는데 지방자치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과열 분위기 없이 치러졌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 직후인 1998년 6월에 열린 제2회 선거는 당시 국내가 IMF 외환 위기라는 특수 상황에서 처해 있던 상황이라 금품 살포 같은 불법이 자행될 여지가 적었다. 이에 반해 이번 선거는 경제가 상당 부분 회복된 데다 여야가 사활을 걸고 있는 대통령 선거를 6개월 앞두고 열리는 선거여서 어느 때보다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지역원 교수는 “노무현 후보가 지방 선거 후에 후보 재검증이라는 배수의 진을 친 상태이고, 한나라 당은 이 선거를 이겨 노풍을 잠재우려고 총력전을 펼치는 등 정치권이 뜨겁게 달아 있어 이번 선거는 과열로 치달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박 교수는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은 국민 경선이라는 참여 정치 실험을 통해 조금이나마 회복한 정치권에 대한 관심을 이어가기 위해선 상호 비방 같은 타락ㆍ부정 선거를 중단하고 정책과 자질로 승부하는 깨끗한 선거를 치러야 한다”며 “그렇지 않고 예전의 구태를 반복할 경우 또 다시 국민들의 정치 불신과 무관심을 불러 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금품ㆍ향응 공세, 흑색선전도 수위 높아져

한껏 달아오른 후보자들은 냉담한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어느 때보다 무차별적인 금품과 향응 공세를 퍼붓고 있다. 현행 선거법은 선거 6개월 전부터 기부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후보 등록을 하기도 전에 수천만원 대의 돈을 뿌리다 적발된 후보가 속출하고 있다.

동창회나 산악회 향우회 등을 빌미 삼아 선심 관광을 보내는 일은 이미 오래된 구태 중의 하나다. 적게는 10여명에서 많게는 100여명에 이르는 유권자들을 상대로 식사 대접을 하다가 줄줄이 검찰에 고발 조치되고 있다.

경남지방경찰청 수사과는 이 달 초부터 2,350만원을 면 단위 책임자인 김씨 등 7명에게 선거운동 경비로 전달하고 유권자 1인당 10만~100만원을 건넨 산청 군수 입후보자의 선거 운동원 문모씨 등 8명에 대해 선거법 위반 혐의로 5월 31일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남지청은 이들로부터 금품을 받은 정모씨 등 46명에 대해서도 같은 혐의로 무더기 불구속 입건했다.

중앙선관위는 공식 선거운동 개시전인 5월 24일 K모 강원 횡성 군수 입후보 예정자측의 선거 본부 관계자 3명이 읍ㆍ면 협의회장 30명에게 20만~50만원씩 총 950만원의 돈봉투를 돌린 사실을 적발했다.

이에 따라 선관위는 선거법상 기부행위 금지ㆍ제한 위반 혐의로 돈을 주고 받은 사람 33명을 춘천지검에 고발하고 K후보에 대해서도 수사를 의뢰했다. 충북도 선관위도 5월 31일 정당 연설회장에서 소속 당 충북지사 후보의 선거 운동을 부탁하며 후보 명함 5,000장과 현금 200만원을 준 이모(54)씨와 이를 받은 안모(62ㆍ여)씨를 충주지검에 고발 조치했다.

후보간의 이전투구식 흑색 선전도 갈수록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선거운동원을 통해 상대 후보의 개인 신상이나 사생활을 문제 삼아 근거 없는 비방전을 펼치는 사례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강원도 철원 경찰서는 31일 군수 후보 경선에 참여한 후보가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내용의 녹취서를 상대 후보 경선 참여자에게 넘겨 배포하게 한 S모씨(52ㆍ여)를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강원도 영월에서는 구모씨(38)가 군청 홈페이지에 ‘모 도의원 출마자가 부인이 암을 앓고 있는데 돈에 눈이 멀어 치료를 해주지 않고 있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가 적발됐다. 경남 진해시에서는 모 시장 후보측 운동원들이 시장을 돌아다니며 “상대 후보가 검찰 수사를 받고 있어 곧 구속된다”고 소문을 퍼뜨려 선관위에 고발 조치 되기도 했다.


공무원 불법선거운동 사례 급증

현직 도지사나 군수, 구청장이 공무원들을 선거 운동에 불법적으로 동원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일상적인 업무를 빙자해 공금을 선거 목적으로 사용하거나 재임 중 업적을 과대 선전해 지지를 호소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경기지역의 한 기초단체장은 부하 직원들에게 관내 통ㆍ이장과 의용 소방대 등 관변 조직단체 회원 3,900여명의 지지 성향을 조사ㆍ보고토록 해 문제가 됐다. 이 단체장은 핵심 측근인 현직 간부직원에게 돈을 주며 선거 캠프 준비까지 맡긴 사실이 드러나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대구의 한 구청장은 관내 21개 동사무소를 순회하며 업무 추진비 명목으로 직원 200여명의 식사비 300만원을 지불한 사실이 적발됐다. 5월말까지 이처럼 현직 단체장의 재당선을 위해 선거 운동에 개입한 혐의로 선관위에 적발된 공무원은 전국적으로 300명에 달한다.

중앙선관위가 적발한 불법 선거 단속 건수는 이런 과열 선거 양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선관위에 따르면 공식 선거운동 개시 전날일 5월 27일 자정까지 적발된 사전선거운동 사범은 총 5,418건으로 1998년 제2회 선거(622건)의 같은 기간에 비해 871%나 급증했다.

유형별로는 금품ㆍ음식ㆍ선심 관광을 제공한 불법 사례가 1,623건으로 제2회 선거(132건)에 비해 무려 11배 이상 폭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28일 공식 선거가 시작돼 31일까지 4일간 단속된 선거위반 건수만 410건에 달해 갈수록 불법 선거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중앙선관위는 예전에 비해 민간 선거 감시 인원을 대폭 증가하는 한편 암행 단속반을 가동, 불법 선거 단속에 팔을 걷어 붙였다.

중앙선관위는 이번에 지방선거로는 처음 정당별 추천자(각 당 3인)를 포함해 구ㆍ시ㆍ군 선관위별로 50명 이내의 선거부정감시단 1만831명을 구성, 감시 활동을 펴고 있다.

또한 지역구 이ㆍ미용실 직원이나 택시기사 같은 비밀 감시 요원 1만5,000명을 구시군 선관위별로 위촉, 신고 제보토록 하고 있다. 이들이 신고할 시 기동단속반이 즉각 현장으로 투입되도록 하는 시스템도 구축했다. 불법 선거 신고에 대한 포상금도 당초 최고 500만원에서 1,000만원으로 대폭 인상했다.

중앙선관위의 한 관계자는 “그간의 지방선거는 총선이나 대선과 달리 정치 색이 별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이번 선거에는 대선 탓인지 유독 정치 색이 강하게 드러나 단속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며 “그간 선거에서 별로 드러나지 않았던 공무원의 선거 개입과 선거 단속 공무원에 대한 폭행 사례가 늘어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말했다.


단체장 40여명 비리혐의로 신법처리

‘불법 선거’는 ‘부패 행정’을 낳는다. 지난 제2회 지방선거를 통해 당선된 248명의 자치단체장 중 40여명이 각종 비리 혐의로 사법처리 됐거나 진행 중에 있다. 투명하고 깨끗한 선거는 후보자는 물론 유권자들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불법 선거 행위를 단호히 거부하는 성숙한 유권자의 힘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송영웅 기자 herosong@hk.co.kr

입력시간 2002/06/07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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