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한·일 월드컵] 그라운드의 지배자 황선홍·유상철·홍명보

한국대표팀 월드컵 첫 승 견인한 노장 3인방

노장 3인방이 한국 축구사를 새롭게 썼다.

황선홍(34), 홍명보(33), 유상철(31). 이들의 노련미가 유감없이 그라운드를 지배했다. 6월 4일 폴란드전에서 터진 첫 골의 영웅 황선홍, 추가골의 주인공 유상철, 수비진을 이끈 홍명보. 1990년대 한국 축구의 대명사였던 이들 노장들은 21세기 첫 월드컵에서도 최고의 기량을 보였다.

황선홍은 전반 25분 이을용의 낮은 왼발 인사이드 센터링을 돌려차기로 슛, 폴란드의 골 네트를 갈라놓았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수 차례 골 찬스를 놓쳐 국민들의 가슴을 애태웠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불의의 부상으로 그라운드에 서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던 황선홍은 첫 축포를 터뜨렸다.


‘킬러’ 황선홍, 축구인생의 화려한 대미

태극마크를 처음 단 1988년부터 14년간 대표팀의 간판 스트라이커로 활약해온 황선홍은 아쉬움으로 점철된 한국의 월드컵 도전사 속에 ‘골결정력 부족’이라는 십자가를 홀로 지다시피 해왔다. 하지만 황선홍은 A매치 96회 출장, 50골이라는 수치에서 보듯 2경기 당 1골 이상을 넣었으며 자신이 4번째 출전하는 월드컵인 이번 대회에서 아낌없이 기량을 발휘했다.

특히 황선홍은 최근 후배들의 앞길을 터주기 위해 이번 월드컵이 끝난 후 미련 없이 대표팀 유니폼을 반납키로 결정해 팬들로부터 칭송의 대상이 됐고 후배들에게는 승리를 부추기는 무한한 자극제였다.

건국대에 재학 중이던 1988년 대표생활을 시작한 황선홍은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과 1994년 미국월드컵에 잇따라 출전하며 정상의 길을 걸었지만 프랑스월드컵 직전에 치른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무릎을 다치는 바람에 엔트리에 들고도 경기에는 나서지 못하는 좌절을 맛봤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 축구선수로는 전성기를 막 넘어 하향세로 접어들 나이였지만 그는 1998년 7월 당시 소속팀이던 포항에서 일본프로축구 J리그의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하면서 선수생활의 일대 전기를 맞았다.

유럽진출이 월드컵 출전좌절과 함께 수포로 돌아간 뒤 차선책으로 택한 일본 생활이었지만 황선홍은 선천적 재능과 경기를 읽는 능력과 넓은 시야 등을 갈무리하면서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 젖혔다.

1999년 J리그 득점왕에 올랐던 황선홍은 일본에서의 꾸준한 활약을 발판으로 34세의 나이로 설기현, 안정환, 최용수 등 쟁쟁한 후배들의 성장 속에서도 대표팀에서 가장 확실한 스트라이커로 평가 받으며 월드컵 주전자리를 예약했다. 히딩크 감독 취임 후 황선홍은 지난해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2골을 넣어 한국의 2승을 견인했고 3월 핀란드전에서 2골을 넣어 ‘킬러’임을 재확인했다.

위치선정, 헤딩, 문전에서의 파괴력, 찬스 메이킹 능력 등 스트라이커로서의 미덕을 두루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 황선홍은 최전방 원톱은 물론 플레이메이커 역할에 가까운 처진 스트라이커까지 폭 넓은 활용도로 히딩크 감독의 신임을 받았다.


‘중원의 지휘관’ 유상철, 미사일포로 승리에 쐐기

홍명보, 황선홍에 이어 세 번째로 A매치 출장경험이 많은 유상철의 두번째 골은 큰 경기에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원조 멀티플레이어’의 투지가 빛난 한 장의 그림이었다.

1998년 예선 탈락이 확정된 벨기에전에서 투혼의 발리슛으로 희망을 이어온 히딩크호의 1기 황태자 유상철은 전반 23분과 26분 두 차례 회심의 중거리슛이 빗나가자 고개를 쳐들고 한숨을 내쉬었으나 후반 8분 세계적 골키퍼 예지 두데크의 양손을 뚫고 지나가는 미사일포로 승리를 확인했다. 미드필드에서 유상철은 특유의 멀티플레이로 폴란드의 거친 중원을 완벽하게 압도했고 연이은 중거리슛으로 두데크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한국축구의 사상 첫 월드컵 승리를 견인한 유상철의 그림같은 오른발 강슛은 미국의 스포츠 전문 인터넷사이트 CNN-SI가 선정한 ‘오늘의 골’에 뽑혔다.

CNN-SI는 6월 4일 벌어진 조별리그 3경기에서 나온 8골 가운데 한-폴란드전의 유상철, 벨기에-일본전에서의 마르크 빌모츠(벨기에), 이나모토 준이치(일본), 코스타리카-중국전의 마우시리오 라이트(코스타리카)의 골을 대상으로 인터넷 투표를 실시한 결과 전체 2,580표 가운데 유상철의 강슛이 55%를 얻어 1위에 올랐다고 밝혔다.


A매치 신기록 세운 대표팀의 ‘방패’ 홍명보

13년째 태극마크를 달고 A매치 122회 출전 신기록을 세운 홍명보의 카리스마는월드컵 첫 승의 아낌없는 밑거름이 되기에 충분했다.

폴란드 왼쪽 날개 크시노베크의 날카로운 센터링을 연거푸 몸을 날린 헤딩 클리어링으로 걷어낼 때마다 좌우에 포진한 최진철, 김태영의 어깨에서는 힘이 났고 태극전사들에게도 무언의 힘이 됐다. 반세기를 기다려온 월드컵 첫 승의 숙원은 30대 노장 3인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부산 장학만기자

입력시간 2002/06/14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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