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핫 이슈 '개헌'] 개헌논의 물꼬…봇물이 되게하라

여야 총론 공감 해석은 제각각, 국민적 공감대 마련해야

대통령이 5년간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현행 국가 권력 구조를 개편해야 한다는 개헌 공론화 주장이 사회 각계에서 힘을 얻고 있다.

학계와 정계 인사들은 “현행 대통령 중심의 5년 단임제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이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정치적 이해 관계에 밀려 공론화 되지 못하고 있다”며 조속히 개헌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개헌은 국가의 권력 구조에 관한 문제라 장기간 국민적 합의를 거쳐 심사숙고 해야 하는 사안이라는 점에서 대통령 선거 6개월을 앞둔 현시점에서 공론화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헌법(182조 2항)에는 ‘대통령의 임기 연장 또는 중임 변경을 위한 헌법 개정은 그 헌법 개정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해서는 효력이 없다’고 규정돼 있어 차기나 차차기 정권부터 새 헌법을 적용하려면 지금부터 개헌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정치적 악용 우려, 논란 외면

헌법 개정 논란은 그간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였다. 일부 개정이나 보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자칫 정치적으로 악용될 것을 우려해 애써 외면해 온 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가 개헌 공론화 발언을 전격 꺼냄으로써 개헌 논의가 정치권의 화두로 등장했다.

그간 ‘정략과 당략을 위한 개헌에 반대한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오던 이회창 후보는 6월 4일 발간된 주간한국(1925호 참조)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현행 헌법이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것처럼 왜곡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국가 혁신 차원에서 개헌 문제를 논의할 필요성이 있다”며 “집권하면 개헌 문제를 공론화해 가급적 이른 시일 내에 매듭 짓겠다”고 그간의 입장에서 180도 선회한 발언을 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 후보는 “대통령제와 내각제, 대통령제 중에서도 5년 단임제와 4년 중임제 등 모든 문제를 철저히 검토해 국민 의사에 따라 매듭 짓겠다”고 말했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도 이 후보의 개헌 공론화 발언이 보도된 하루 뒤인 5일 첫 특보단 회의에서 “(대통령)선거 후의 국정 계획에 대한 큰 틀을 짜야 한다”며 “2010년, 2020년 등 10년 이상을 내다보고 지도를 그려야 한다”고 개헌을 염두에 둔 발언을 했다.

노 후보는 4월 20일 주간한국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개헌에 대해 여러 생각을 많이 해 나름대로의 판단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 쪽으로도 결론을 내린 것은 없다”며 “한국 정치의 문제는 권력 구조가 아니라 정치 문화에 있다. (현행 대통령 단임제 하에서도)정치 문화만 제대로 되면 된다”고 말해 그간 개헌에 유보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정치권은 이회창 후보의 전격적인 개헌 공론화 발언을 놓고 의원 개인 마다 서로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의원내각제를 주장하는 자민련을 제외한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은 아직 당 차원에서 개헌 방향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이로 인해 현재 개헌 문제는 정당별로 통일되지 못한 채 개별 의원마다 각기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

민주당은 이 후보의 개헌 공론화 주장에 대해 내부적으로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다. 노무현 후보의 정무 특보인 천정배 의원은 “그간 개헌에 반대해 왔던 이 후보가 개헌 주장을 함으로써 국가 지도자로서 국가의 근본 구조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이미지를 부각 시키기 위한 정지 작업을 시작했다”며 “발언 내용이 추상적이어서 성급히 논평하기는 이르다”고 평가 절하 했다.

정균환 민주당 총무는 “이 후보가 개헌 논의에 전향적 자세를 취한 것은 긍정적이나 대통령제 외에는 말도 못 꺼내게 하다가 왜 갑자기 입장을 바꿨는지 먼저 설명해야 한다”며 “국가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가 아니라 선거 전략 차원에서 개헌론을 꺼낸 것이라면 정치 지도자의 자세가 아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민주당 이해찬 의원은 “이 후보에게 주도권을 뺏긴 감은 있지만 기형적이고 소모적인 권력 구조를 개편하는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한다”면서 “정ㆍ부통령제 도는 책임 총리제 도입, 대선과 총선 시기의 일치, 대통령 권력 부산, 감사원 감사 기능의 국회 이관 등을 골자로 한 개헌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의원은 “유신 이후 대통령의 권력은 달라진 것이 없고, 그 때문에 ‘전부 아니면 전무’식의 권력 투쟁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현재 권력 구조 대로라면 집권 후반기 누수 현상은 불가피하며, 그로 인한 국가 에너지 낭비가 크다”고 설명했다.

이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 후보 측에도 개헌 논의에 착수해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상규 의원도 최근 “대통령 중심제의 폐단이 커 의원 다수가 의원 내각제를 선호한다”며 “이원집정부제도 고려해 볼만하다”고 말한 바 있다.


권력구조 개편에 여야 원칙적 공감

민주당은 천호선 부대변인은 “당면한 지방 선거 운동으로 아직 개헌에 대한 당내 공론화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최근 의원 워크숍 때를 비롯해 몇 차례 개헌 주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며 “강력한 개헌 찬성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한나라 당도 당 차원에서는 비공식적이지만 개헌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한나라 당의 국가혁신위원회(위원장 김용환)는 정책 연구에 대한 최종 보고서에서 ‘이회창 후보가 집권할 경우 차기 정부 임기 안에 권력 구조 개 편을 포함한 전면적인 개헌을 논의해야 한다’고 이 후보에게 건의했다.

혁신위는 개헌과 관련해 4년 중임제와 정ㆍ부통령제, 내각제 뿐 아니라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 제한 △감사원의 국회 이관 △선거제도 변경 △국무총리제 존폐 여부 등을 전면 검토해 차기 정권 내에 헌법을 둘러싼 논쟁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보고했다.

한나라당 심규철 의원은 “현행 대통령 중심제는 집권 여당이 원내 다수당이 되려고 의원 빼가기를 시도하는가 하면, 대선을 앞두고 1년 내내 의회가 사실상 마비되는 부작용이 반복되고 있다”며 “개인적으로는 의원 내각제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심 의원은 “대선과 총선을 연이어 치르게 되는 현행 체제하에서는 국력과 행정력의 낭비가 불가피 하다”며 “문민 정부와 국민의 정부의 경우를 볼 때 대통령 임기가 5년도 길다는 평가가 있어 대통령 4년 중임제로의 개헌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이부영 전부총재도 당내 대선 경선에 나서면서 “여야 합의로 헌법 개정 추진위를 만들어 영토 조항 등을 전면 개정해야 한다”며 “(집권하면)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대통령 군한 분산시켜야'

한국미래연합 박근혜 대표도 6월 7일 MBC와의 인터뷰에서 “한 정치 세력으로부터 대통령은 외교와 국방을 맡고 총리는 내각을 책임지는 방안을 제안 받았다”며 “우리에게 맞는 권력 구조를 모색한다는 차원에서 깊이 생각해 볼 문제”라고 밝혔다.

앞서 박 대표는 5월말 이인제 의원과 회동에서 “당리당략 차원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을 위해 정치인들끼리 권력 구조의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며 개헌에 긍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이인제 의원도 박 대표와의 회동 후 “대통령 한 사람에게 절대 권력이 집중되는 폐단에 대해 비판적 여론이 있고, 권력을 조화 있게 나누자는 요구가 많다”며 “대통령이 외교와 국방에 전념하고 의회 다수당이 내정을 책임지는 권력 분립형 대통령제로 개헌해야 한다”고 개헌 필요성을 주장했다.

여야 일부 의원들도 현행 권력 구조 개편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낸 바 있다. 올해 2월 한나라당 서상섭, 민주당 김택기, 자민련 조부영 의원 등은 현행 대통령 중심의 권력 분산 필요성을 강조하며 개헌 공론화를 시도했다.

조 의원은 당시 “부패와 레임덕 현상, 공무원의 선거 개입 등은 대통령 1인 중심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내각책임제가 되면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서 의원은 “4년 중임제, 내각 등의 권력 구조에 대한 논의는 남북 평화 조성, 국회와 행정부의 견제와 균형 등 민주적 내실화 논의를 포함하는 총체적인 개헌 논의가 공론화돼야 한다”고 개헌론에 가세했다.

이한동 국무총리는 6월 5일 주간한국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현행 권력 구도의 속성상 대통령의 임기 말 레임덕은 불가피하다”며 “사견이지만 현행 대통령 5년 단임제는 내각제로 가든, 아니면 대통령 4년 중임제로 정치권이 심각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개헌의 필요성을 시사했다.

제16대 국회 전반기를 이끌었던 이만섭 국회의장도 “현재 권력 구조에서는 대통령이 전권을 휘두르는 제왕적 성격이 강해 무엇보다 대통령 권한을 분산시켜야 한다”며 “국가 백년 대계를 위해서도 ‘대통령 중심제를 유지하며 권력을 분산하느냐, 내각제로 바꾸느냐, 이원집정제로 하느냐’는 권력 구조 개편 문제를 시급해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의장은 “가급적이면 대선과 총선, 지자체 선거 등 모든 선거를 동시에 치르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ㆍ현직 국회 의원들 중 다수는 의원 내각제로의 개헌을 지지하고 있다. 현행 제도로는 대통령 1인에 국가 절대 권력이 집중되는 제왕적 대통령제로 운영될 수 밖에 없어 각종 권력형 부정 부패가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은 외교, 국방 같은 대외적인 권한만 행사하고 국정 운영은 다수당이 책임을 지고 하는 내각제가 우리 현실에 적합하다는 주장이다.

현행 헌법은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7년 10월 29일 9차 개헌을 통해 만들어진 6공화국의 헌법 법통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당시는 서슬 퍼런 군사 독재 정권과 민주화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무질서와 혼돈의 시절이었다.

또한 미ㆍ소 동서 냉전이 치열했고, 이념 대립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당시 국민들에겐 군사 독재 정권이 계속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자르는 것이 지상 과제였다. 당시 제정된 헌법도 이런 정치ㆍ사회적 영향을 그대로 투영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세상은 달라졌다. 지난 15년간 동서 냉전은 구시대의 유물이 됐다. 군사 독재는 이제 더 이상 이땅에서 발을 붙이기 힘들게 됐다. "

이제 지구촌은 세계화와 지역 경제 블록화 등 새로운 패러다임에 따라 급변하고 있다"며 "우리 헌법도 낡은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국가 경쟁력을 최고조로 끌여 올릴 수 있는 견인차가 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송영웅 기자

입력시간 2002/06/14 16:05


송영웅 heroso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