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충북 제천시

제천은 본래 고구려 때는 나토(拿吐) 또는 대제군(大堤郡)이었다. 그러나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나제군(奈提郡)으로 바뀌었다. 그 뒤 고려조에는 다시 제주(提州)로 고치고, 별칭으로 의원 또는 의천(義川)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조선조 태종(太宗) 13년(1413년)에 이르러 제천(提川)으로 한 것이 오늘의 땅이름이다.

그러나 1980년 4월 1일 제천읍이 시로 승격, 제원군과 함께 모두 제천시 영역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고구려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둑방(언덕)’의 뜻인 ‘제(提)’자가 늘 땅이름에 붙어 다닌다는 사실이다.

둑방(提)이 있으면 물이 있다고 했던가.

1979년에 착공해 1985년에 완성된 충주 다목적댐으로 인해 제천고을은 온통 골짜기마다 푸른 물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8개면 125개 마을 가운데 5개면 61개 마을이 바야흐로 우리 지도에서 영원히 지워진 것이다. 이 정도쯤 되면 가히 하백(河伯=水神)의 난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치산치수로써 경국지업(經國之業)의 큰 터를 이룩했던 저 삼대(三代ㆍ중국 고대 국가인 夏,殷,周)의 전설에 비하면 과연 어떠할까!

그러다가 보니 겨우 수몰을 면한 곳은 물에 걸리고 산에 막혀 지척이 천리가 되거나 옛날 이야기처럼 십리쯤 가야 이웃집을 만날 수 있는 360여 가구를 위하여 19개소에 마을을 새로 만들기도 했다.

충주다목적댐으로 인해 예견치도 않았던 땅이름들이 현실로 나타났다. 한수(寒水)면은 말 그대로 ‘찬물(寒水)’골이 되었는가 하면, 옛날 남한강가 갯여울은 그 이름처럼 ‘포탄(浦灘)’이 되고 말았다.

또 수산과 지곡은 땅이름의 뜻과 같이 ‘물메(水山)’와 ‘못골(池谷)’이 되어 버렸다.

지척이 천리가 되다 보니, 다리도 여럿 놓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이 고을 금성면에는 어떤 연유에서 인지는 몰라도 예로부터 ‘높은 다리동네(高橋洞)’라고 불러온 마을이 있었다. 충주호 속에 잠겨버린 청풍(淸風)의 북쪽지역으로 ‘높은다리동네’ 아래에 박쥐굴이 있어, 그 마을을 달굴(月窟)이라 부르는 동네도 있었다.

그런데 금성면의 동막마을 북쪽에서 작은 개울이 흘러내려 서남쪽으로 양화리, 위림리, 중전리를 관류하여 달굴마을로 흘러드는 작은 개울 위에 놓인 자그마한 다리를 두고 이 곳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높은 다리’라 불러왔던 것이다.

‘다리’라야 겨우 사람의 키 높이 정도 될만한 작은다리를 두고 ‘높은 다리’라니 참으로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생겼다. 충주다목적댐에 담수가 시작되면서 ‘높은 다리동네’에 있던 이 작은 다리는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위에 새로운 현대식 높은 다리가 놓였으니 ‘높은다리’동네라는 땅이름처럼 높은다리(高橋)가 놓인 꼴이 되었다. 어떻게 되었건 ‘높은다리’동네라는 그 예언성 땅이름에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지금은 그 높은다리위로 597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다리는 격리된 곳을 서로 이어주는 구실을 한다. 이 곳에 이미 물이 찰 것을 예견한 선조들의 혜안이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이홍환 현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입력시간 2002/06/16 17:20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