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종로구 숭인동 '동묘'

종로 숭인동 220번지에 자리한 ‘관왕묘(關王廟)’ 또는 서울 동쪽에 있어 ‘동묘(東廟)’라고 부르는 유적이 있다. 삼국지(三國誌)에 등장하는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詞堂)이다.

제단에 ‘당(堂)’이 아닌 ‘단(壇)’이나 ‘묘(廟)’가 붙으면 나라에서 제사를 올리는 대단히 신성한 성역의 터전을 뜻한다.

왜 관왕묘가 여기에 서게 되었을까?

정전(正殿)의 내부를 살펴 보니 관우를 금동상으로 모셨다. 오른쪽에는 관평(冠平), 조루(趙累), 왼쪽에는 주창(周倉), 왕보(王寶)의 소상(塑像)이 모셔져 있다.

전설은 이러하다. 조선조 선조 25년(1592년)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구의 대병력이 부산에 상륙해 동래성을 무너뜨리고 불과 20여일만에 서울에 이르게 된다.

이때 왜병의 선봉대가 2,000 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청량리를 지나 조총을 쏘며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쪽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광풍이 일더니 왜병들은 눈을 뜰 수 조차 없는데, 앞에는 붉은 적토마를 탄 9척 거구에 석자 수염을 흩날리며 8장이나 되는 청룡도를 든 관운장이 눈을 부릅뜨고 버티고 있었다고 한다.

또, 관운장 뒷편에는 안개와 먼지가 자욱하여 지척을 구별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만 군사들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다고 한다.

왜병들은 겁에 질려 퇴각했다가 다음날 다시 군사를 재정비하여 도성근처를 수색하며 쳐들어왔으나 사태는 전날과 마찬가지였다.

퇴각한 왜병들은 하는 수 없이 작전을 논의하던 중, 병서에 꽤 밝다는 왜장 하나가 이르기를 조선국에 광풍과 신장(神將)과 신병(神兵)이 신출괴몰하는 것은 ‘그 옛날 삼국시대를 풍미했던 제갈공명 같은 군사(軍師)의 계략이지만 다른 병법을 짜서 해결하겠다’고 장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왜군은 3일째 되던날 다시 서울도성의 흥인지문쪽으로 쳐들어 왔으나 사태는 또한 같았다.

이때 왜병들은 재빨리 준비한 백마의 피를 뿌리며 전진하자 심하게 불어 오던 광풍도 멎고 신출귀몰하던 관운장과 신병들도 사라졌다는 전설이다.

당시에는 풍수사상이 유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서울의 지세에서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駱山) 자락에 있는 흥인지문밖에 청룡도를 든 관운장을 등장하고, 여기에 백호(白虎)격인 백마의 피를 뿌림으로써 상극적 효과를 나타내는 풍수적 주술과 얽힌 전설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떻게 됐든 왜란이 끝나고 선조 33년(1600년) 명나라 신종황제(神宗皇帝)가 금 4,000 냥을 보내와 임진왜란 때 현령(顯靈)으로 나타나 왜병을 물리친 관우의 사당을 흥인지문 밖에 세우도록 했고, 35년(1602년)에는 사당이 준공되었다.

신종은 친히 ‘현령소덕관공지묘(顯靈昭德關公之廟)’의 여덟 자를 써서 현관을 걸도록 했다. 이는 명나라가 임진왜란 당시 원병한 것을 구실로 기념비적인 흔적을 남긴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그 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조정에서는 이를 꺼려 현판을 떼어 보관하다가 청이 쇠락하자 다시 달았다.

제사도 나라에서 도맡아 지내다가 융희 2년(1908년)에 폐지하고, 융희 3년(1909년) 4월에 서묘(西廟)인 숭의묘(崇義廟)와 합쳐서 인근 주민들이 제사를 지내다가 1913년 5월에는 다시 북묘마저 합사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결국 관왕묘는 지난날 강대국을 사대(事大)하기에 급급했던 부끄러운 역사의 장이었던 것이다.

이홍환 현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입력시간 2002/06/2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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