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축구사료 수집광 이재형

축구에 인생 건 한국대표급 괴짜

이재형(41)은 축구장 밖에서 뛰는 주전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 이후 그는 안정환 등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소식과 사진이 화려하게 박힌 신문들을 종류별로 사 모으고 있다.

전부 24개. 불룩한 신문더미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자못 흐뭇하다. “각 신문의 1면 톱에 모두 축구 기사가 오르는 이런 역사적인 경우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집에 보관할 겁니다. 스크랩을 할 지, 통째로 둘지 고민해야 겠습니다.”

‘돈도 안 되는’재산이 나날이 불어가자 72세 노모의 꾸지람도 커지고 있다. 그만한 정성을 여자에 쏟았으면 진작 결혼했을 아들이다. 20년간 이 산더미 같은 ‘잡동사니’에 제 돈 3억원이나 쓰고도 희희낙락이다.

10년 전 돈 잘 벌던 사업도 걷어치우고 갑자기 축구전문기자가 되겠다고 나선 아들이다. 어릴 때도 축구라면 사족을 못 쓰고 뛰어나가는 것을 보다못해 장독대 안에 신발까지 감춰뒀건만 그래도 맨발로까지 공을 차러 나가던 못 말리는 아들이었다. 커서 더 모친의 속을 썩히고 있다.


축구에 관한 한 박물관급 수집품

“아무래도 하느님이 저더러 이 일을 하라고 보내신 것 같습니다. (주민등록증을 꺼내 보여주며) 제 생일도 월드컵 개막일과 똑같은 5월 31일이지요. 운명 아니겠습니까! (웃음)” 이씨의 수집물은 가히 박물관급이다.

그 중 일부가 현재 서울 명동 서울은행 본점에서 공개되고 있다. 4월부터 시작된 역대 한국 축구대표팀 사료전시회다. 원래 한 달만 전시하기로 했던 것이 두 번이나 기간이 연장된 끝에 결국 월드컵이 끝나는 6월 말까지 계속하기로 결정됐다.

그만큼 반응이 높고, 의미있는 행사다. 실제로 개인의 힘으로 모았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귀하고 재미있는 자료들이 가득하다. 각 월드컵 대회의 기념 주화며 메달, 우표, 배지, 전화카드는 물론 우리나라 역대 국가 대표 선수들이 입었던 유니폼, 축구화, 가방, 축구공, 팸플릿, 단체사진 등 종류부터가 다양하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당시 한국대표팀 감독이었던 고 김용식 선생의 친필 작전지시서에다 당시 선수들의 필승기원이 담긴 친필서명, 조선말기 영국 수병을 통해 도입된 한국 최초의 축구화, 1920년대 농촌에서 쓰이던 지푸라기 축구공, 국내 최초의 해외여행권,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김용식 선생이 신고 뛰었던 낡은 축구화, 손바닥면이 금방이라도 가루로 부서질 듯 닳고 닳은 한국 최초의 골키퍼 장갑 등 곳곳마다 눈길을 붙잡는 것들이다.

“시간과 열정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돈도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제 월급의 3분의 1은 축구관련 자료들을 모으는데 나갑니다. 백화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 하나 하나마다 직접 찾아 다니며 어렵게 구한 것들이라 더 애착이 큽니다. 축구 선수가 되지 못한 한(恨) 때문에, 보상심리로 이 일에 더 중독처럼 빠져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려서 부터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다. 성북초등학교 시절, 동네 형들이나 친구들과 어울려 집 부근 공터에서 축구를 하는 게 일과였다. 틈만 나면 공터로 달아나는 아들 때문에 어머니는 운동화가 헤프게 닳을까 봐 신발을 숨겨놓기까지 했지만, 공차기에 정신이 팔린 아들은 맨발로라도 뛰어나가 해질녘에야 들어오곤 했다.

소풍 길까지도 축구공을 들고 간 적이 있다. TV에서 축구경기만 열리면 홀린 듯 구경하곤 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축구영웅이란 영웅의 이름은 빠짐없이 외고 다녔고, 그들의 환상적인 경기장면은 평생 그의 머리 속에 각인이 되어버렸다.

초등학교 축구부에서도 센터포드를 맡아 제법 실력을 인정 받았지만, 축구부가 없는 홍익중에 입학하면서 축구선수의 꿈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홀로 어렵게 생활을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는 공부 대신 스포츠에 열광하는 아들이 근심스럽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매일 하교 길이면 다른 학교 축구부의 연습광경을 지켜보느라 그의 귀가길은 번번이 늦어지곤 했다. 기계공고를 거쳐 1986년 인하공대를 졸업한 뒤 금속관련 회사에 취직했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1년 만에 퇴사했다.

곧 수원에서 여성들의 옷, 벨트 등을 판매하는 작은 사업을 시작해 제법 돈을 벌었다. 그러던 중, 1993년 갑자기 하던 일을 정리하고 현재 그가 기획부장으로 있는 축구전문잡지 월간 축구사에 입사, 기자가 되었다.

축구관련 용품들을 수집하기 시작한 건 그보다 10년 전인 1980년대 부터였다. 처음엔 단순한 취미 정도로 축구 우표, 포스터, 열쇠고리, 인형 따위를 모으는데 불과했다. 시간이 지나자 ‘이왕이면 가치가 있는 것들을 모아보라’는 주위의 조언에 유니폼, 팸플릿, 사진 등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풍성하고 귀중한 자료들로 쌓여갔다.

축구기자가 된 후에는 더욱더 탄력을 받았다. 취재차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축구사료의 행방을 수소문해 찾았고, 골동품상들이 밀집된 서울의 인사동, 황학동, 장안동 등 샅샅이 훑어 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행여 축구사료가 나올세라 경매시장도 수시로 기웃거렸다. 외국 출장 길에도 틈만 나면 현지의 골동품상이나 벼룩시장 일대를 돌며 사료를 찾아 헤맸다. 축구인들은 물론 축구관련 업체 관계자들이나 그 가족들까지 빠짐없이 만나고 다녔다.


인간적인 교류 통해 자료 얻어

실제로 그가 모은 사료들 대부분은 돈이나 목적에 앞서 인간관계를 통해 얻어진 것들이다. 한국 축구계의 전설적인 영웅으로 일컬어지는 김용식 선생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뛰며 신었던 소가죽 축구화는 평생 축구화만을 전문 제작해 온 한 업체 사장이 가보로 간직하고 있다가 건네주었다.

스위스 월드컵 감독시절 그의 친필 작전지시서를 입수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 팀 주장이었던 고 주영광씨의 딸 소진씨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이씨에게 기증한 것이었다. 조선 말기에 처음 들어왔다는 국내 최초의 축구화는 골동품 경매시장에서 찾아냈고, 1920년대 지푸라기로 엮어 만든 축구공은 시골의 한 할아버지가 갖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얻어낸 것이다.

낡디 낡은 최초의 골키퍼 장갑은 당사자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다. 스위스 월드컵 당시 셔츠 아래 온 몸에 피멍이 들 정도로 맹렬히 골문을 지켰던 골키퍼이자 원로 축구인 홍덕영씨는 50년 가까이 그 낡디 낡은 장갑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월드컵 출전멤버로 뛰었던 스위스 월드컵 당시 출전 선수들의 친필서명을 얻는 데는 600만원이나 들었다. 이것은 원래 경북지역의 한 고서적 경매에 나왔던 것으로, 이씨가 축구사료를 모은다는 이야기가 알려지자 이를 소장한 사람이 직접 이씨에게 연락을 해왔다.

부랴부랴 대구로 내려간 그에게 제공자가 부른 금액은 800만원. 어렵사리 값을 깎긴 했지만 그마저 가진 돈이 없어 카드로 지불하고 왔다. 거금이 달아난 것도 아랑곳 없이, 그날 밤 이씨는 밤새 흥분에 들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재미있는 것은, 유명한 선수일수록 가진 자료가 거의 없고, 무명선수에겐 좋은 자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경기에서 활약했던 차범근 선수만 해도 자신이 입었던 유니폼 하나 지금까지 갖고 있는 게 없습니다.

이회택씨의 선수 시절 사진도 본인조차 없는 사진입니다. 유명한 주전 스타들이니 워낙 언론에서 많이 소개되는데다 출전기회도 많아 특별히 자료보관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유니폼이든 축구화든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준 것입니다.

반면 무명 선수들은 아무래도 입장이 다르다 보니 한 경기 한 경기마다 자신의 흔적에 훨씬 애착을 갖게 되지요.

예를 들어 외국경기에 나갔을 때도 현지 운동장의 잔디가 끼인 채로 축구화 그대로 들고 와 보관하는 등 친구들에게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당시의 사소한 물건들까지 세심하게 챙기고 보관해 두었습니다.”

이번 전시회에 내놓은 것은 국가 대표팀에 관련된 것들로만 추려서 공개한 것으로 그의 수집품들 중 일부에 불과하다.

서울 성북구 삼선동 집에는 축구관련 서적만 3,000여 권, 사진자료 3,000여 컷을 비롯해 총 1만여 점의 자료가 보관돼있다. 한때 화재사고를 당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서울의 집에 자료를 보관하기가 불편해 수원의 한 보관창고에 두었는데, 어느날 옆집의 불길이 번져 서울의 집이 깡그리 잿더미로 변하는 변을 당했다. 만약 집에 두었더라면 그대로 연기로 사라져 버릴 뻔 했던 생각만 해도 아득한 일이다.


월드컵을 한국축구사 재평가 계기로

“지금 우리가 열고 있는 월드컵은 단지 운이 좋아 어느날 불쑥 떨어진 행운이 아닙니다. 지난 세월 그 어렵던 시절에도 한국축구를 위해 열심히 뛰었던 분들의 땀과 눈물이 쌓여 오늘이 이뤄진 겁니다.

이 축구 사료들과 이번 월드컵을 통해 우리 한국 축구의 역사가 재평가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지금도 그는 역대 대표팀 출전 선수들의 명단은 물론 한국 축구의 역사를 시대별로 줄줄 외고 다닌다.

현장의 실제 주인공이었던 원로 축구인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감탄할 수 밖에 없는 ‘수다맨’ 수준의 실력이다. 직접 운동장을 누비는 맹렬 아마추어 선수이기도 하다. 조기 축구회에서 오랫동안 활동, 매주 일요일은 공과 함께 보낸다.

현재 종로구 40대 대표선수로도 활약중이다. “얼마 전 한 방송아카데미의 초청으로 강연을 했을 때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비전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반드시 성공하게 돼 있습니다. 자신감과 애착부터가 남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큰 탄력을 받아 빨리 발전할 수 밖에 없지요. “


축구 박물관 생기면 모두 기증할 계획도

그의 수집행진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부산에서 골 넣는 골키퍼인 파라과이 칠라베르트의 친필 사인이 쓰인 유니폼을 손에 쥐고 돌아왔다. 그를 추종하는 팬들의 사인을 받아 정성스레 선물로 들고 간 이씨에게 칠라베르트는 주저없이 자신의 유니폼을 답례로 내주었다.

이렇게 쌓인 자료들은 언젠가 지자체와 뜻을 맞춰 축구박물관을 세운 후 아낌없이 기증할 생각이다. 모으긴 혼자서 모았지만, 어차피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해 시작한 일이다. 한반도에 축구가 들어온 지 100년 만에 열린 월드컵, 그 한 켠에 1인 3역의 이씨가 함께 뛰고 있다.

“결혼이요? 좋은 분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하고 싶지요. 우선은 저의 일을 이해해줬으면 좋겠고, 축구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더 바랄게 없지요. 그 외엔 아무 조건도 없습니다.”

글·사진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2/06/21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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