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k뉴스포탈 한국일보
일간스포츠
서울경제
KoreaTimes
주간한국  
www.hankooki.com  


 
주간한국 홈
구독신청
독자 한마디
편집실에서

 


   벤처 밸리 24시
   비만클리닉
   김동식문화읽기
   사이언스카페
   인터넷 세상
   한의학
   땅이름과 역사

맛이 있는 집 그림펀치 라디오 세상 스타 데이트 신나는 세계여행

[어제와 오늘] 해리슨과 한국전쟁

북한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어하는 이들은 미국 국제정책연구소 선임연구원 셀리그 해리슨을 안다. 요즘도 한 달에 한번 정도 한겨레 신문 해외논단에서 그의 칼럼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이 신문 6월 5일자에 기고한 ‘부패 대통령들의 평가기준’이란 칼럼에서 북한과 적극적인 대화를 한 노태우 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을 부패 대통령에서 빼주려 하고 있다. 그는 그 이유로 노 전 대통령의 경우 가족들이 거의 부패에 연루되지 않고 자기 이름으로 감옥에 간 점을 들었다.

김 대통령에 대해서는 “비록 아들들이 그의 명성을 더럽히도록 놔둔 것이 슬프고 싫지만… 김 대통령은 북한을 악마화하는 시각을 불식하고 북한과의 더 안정된 관계를 위한 기회를 여는데 성공함으로써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주장했다. 1972년 ‘7ㆍ4 공동성명’ 직후 당시 의원이었던 김 대통령을 만나 ‘통한(統韓) 3단계 추진방안’을 인터뷰한 그로서는 대단한 칭찬이다.

그는 워싱턴 포스트의 동북ㆍ동남아 특파원으로 1967년 한국을 처음 취재차 방문하고 72년 북한을 방문해 수령 김일성을 처음 인터뷰했다. 그는 그 후 7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1980년대에 신문사를 나와 브루킹스연구소, 카네기 재단 등의 선임연구원 노릇을 했고 1994년 카네기재단 재직시 제네바 북ㆍ미 핵 합의의 막후 역할을 했다.

이런 그가 보더라도 ‘6ㆍ15 남북공동선언’ 2주년을 맞는 서울과 평양의 표정은 흥분과 감격, 포옹으로 가득했던 2년 전 그 모습과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는 꼭 2주년을 기념해 책을 쓰지 않았지만 5월에 낸 ‘한반도 전쟁의 막판(Korean Endgame)-재통일 전략과 미국의 불개입’이란 그의 첫 한국에 관한 책도 판매량이 1만부 정도에 그치는 등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그가 기자로서 35년간에 걸쳐 남ㆍ북을 오가며 취재했던 시시콜콜한 것에서 “이런 일이 과연 있었나”를 알게 해주는 사실까지 전해준다.

그는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에 대해 4권의 책을 낸 저널리스트며 국제정치학자다. 그런데도 왜 그의 ‘한반도…’는 관심을 끌지 못할까? ‘6ㆍ15 공동선언’에 나타난 국가연합과 ‘낮은 단계 연방제’에 대한 그의 착실한 해석에 대한 남ㆍ북한 강경론자들의 무시가 그 첫번째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두 번째는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꿔 현재도 진행중인 한국전쟁을 종전시키기 위한 남ㆍ북한 군축과 주한미군 철수 및 미국의 한국전쟁 재발 때 재개입에 대한 그의 주장을 미국과 한국 등의 우파 인사들이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평화협정과 남북한 군축 문제에 해박하다. 그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1972년 5월초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수령 김일성을 면담을 하고 난 후, 그는 처음으로 평양 취재길에 나섰다. 그때 평양의 언론은 “위대한 수령이 경제를 살리기 위해 북ㆍ남이 군대를 줄여야 한다.

주한미군의 철수 없이 북ㆍ남 군축은 공평 한 것이 될 수 없다”면서 선전ㆍ선동에 열을 내고 있었다. 그에게 6월 26일께 첫 인터뷰가 허가 되었고 그 후 수령과 담소가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어졌다.

“당신 나라(미국)가 러시아와 중국과 데탕트하는 것을 우리는 지켜 볼 수 있소. 우리(북한)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거요. 우리는 지금 군대 및 군비 증강에 큰 짐을 지고 있소. 내 생각에는 남ㆍ북간에 군대 수는 15만~20만 명이면 될 것 같소.”

그 후 수령의 병력축소는 75년에 15~20만 명으로 공식화됐다. 남ㆍ북간의 대화에서(87, 88, 90년) 40만 명에서 출발한 축소병력은 90년에는 10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주한미군을 얼마나 줄이고 계속 주둔 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90년대 들어와 한반도 군축의 핵심문제가 되어 갔다.

수령은 94년 6월 17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만나 말했다. “남ㆍ북이 DMZ에서 똑 같은 거리 만큼 철수 할 필요는 없소. 우리는 남쪽보다 더 멀리 철수할 수 있소. 서울의 위치를 감안 해야지요, 그리고 미군은 남ㆍ북이 줄이는 만큼 줄여 주둔하면 됩니다. 우리(남북)가 반으로 줄이면 미군도 반 줄여야지요.” 결국 미군은 통일 후에도 한반도에 주둔 할 수 있는 물꼬를 수령이 터 놓은 것이다.

해리슨은 72년과 94년의 두 차례 수령과의 회견에서 얻은 주한 미군은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협정을 체결 하는데 좋은 중계자(broker)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가 결론 내린 것은 한국 종전안, 즉 평화협정 안이다.

먼저 미국과 북한, 한국이 동의한 평화협정안을 서로 서명한다. 3국이 참여한 평화군사위원회를 만들어 이 산하의 남ㆍ북 군사위원회가 남ㆍ북간 군축을 다룬다. 주한 미군의 군축 및 철수는 남과 미국간 상호 방위조약에 의한다.

평화군사위원회는 한국에 평화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주한유엔군사령부가 소멸되었음을 안전 보장이사회에 보고한다. 주한 미군은 한반도 평화정착 위한 감시역을 한다는 것 등이다.

해리슨은 언론인이기에 그의 책에서 주장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94년 김정일 국방 위원장 등장 후 북한 노동당 내부에서 경제개혁에 반대하는 강경파가 생긴 것은 확실하다고 분석했다. 김 위원장이 확고하게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고도 보지 않았다.

다만 개혁을 숨어서 해야만 하는 배경에는 신 군부의 입김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김 위원장이 아버지 수령의 ‘주한 미군 계속 주둔’이라는 유훈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김 위원장은 주한 미군의 주둔을 바라고 있을까.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2002/06/21 17:43



 

◀ 이전화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