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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LP여행] 동요포크가수 이성원(上)

[추억의 LP여행] 동요포크가수 이성원(上)

 순수의 메아리 된 우리가락 우리소리

불혹의 나이에 동요음반을 발표한 포크가수 이성원. 흔치 않은 동요 가수로 대중들은 그를 기억하지만 사실은 곽성삼, 김두수와 더불어 1980년대 3대 언더 포크가수로 가요 마니아들의 추앙을 받는 아티스트다.

덥수룩한 수염에 치렁치렁한 장발은 기인의 향내를 풍기지만 자유로운 영혼에 순응하는 외견일 뿐 실은 맑은 영혼으로 노래하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사람이다.

그는 포크로부터 출발해 국악과 민요, 동요에 이르기까지 20여 년 동안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노래해 왔다. 최근 동요가수로 제법 인지도가 높아졌지만 화려한 주류무대와는 여전히 거리를 두고 그저 자신의 노래를 듣기 원하는 돈 안되고 소박한 무대만을 찾아 나서는 별난 사람이다.

그의 동요는 기억 저편에 실종된 어릴 적 추억과 다정했던 사람들의 존재를 되살려놓는 마력을 지닌 가락이다. 똑같은 동요도 그가 부르면 가슴이 시려온다. 그래서인가 그의 동요가락은 어린이보다 어른들이 오히려 즐겨 듣고 눈물을 훌쩍인다.

이성원의 노래 가락은 살벌한 생존경쟁사회에 조용히 울려 퍼지는 아침 이슬 같은 무균질의 결정체이다.

이성원은 1961년 4월 5일 경남 진해에서 지방지 신문기자로 활약하다 개인사업을 했던 부친 이석곤과 모친 김기연의 1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당시엔 갖기 어려웠던 전축을 갖춰놓고 재즈 등 흑인 음악을 즐기고 노래자랑대회에서 입상을 했을 만큼 음악을 사랑했다.

음악 소리가 멈추지 않았던 윤택한 집안의 외아들 이성원이 음악의 달콤함을 일찍 알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진해 도천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물동이를 지고 가면서 바람에 부대끼는 뒷산 대나무 소리 등 온갖 자연의 소리가 좋았던 이성원. 4학년 때 하모니카를 가르쳐주신 고정엽 선생님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러나 부친이 황달과 고혈압으로 일찍 세상을 등지자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어머니는 모진 고생을 겪으며 어렵게 네 자녀를 키웠다. 진해 중학교 때는 월사금을 내지 못해 수업 중에 집으로 쫓겨와 정학까지 먹을 정도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만도 기적이었다.

같은 처지의 여동생은 등록금을 내지 못해 졸업장 없는 졸업생이 되었다. 궁핍한 생활이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현실에 순응했다. 진해상고 3학년 때 친구 집에서 우연히 접한 통기타소리는 답답한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주었다.

졸업 후 신문, 우유배달과 가구점 일꾼으로 전전했다. 그러나 우유 배달 중에 어려운 노인이나 아이들을 만나면 우유를 거저 나눠주고 신문 배달 때는 못된 20명의 불량배들과 한판 대결을 벌였을 만큼 정 많고 의협심 넘치는 청년이었지만 일꾼으론 미덥지 못했다.

1981년 해태유업에서 전국의 직원을 대상으로 장기자랑대회를 열자 노래로 1등을 해 상금으로 빚진 우유 값을 갚고 나왔다. 이후 세광전지의 지점에 사무직으로 취직해 1년간 근무했다. 어느 날 ‘합창단을 조직하라’며 본사로 부터 기타가 지급됐다.

독학으로 기타연습을 하고 있던 터라 무엇보다 반가웠다. 그러나 업무 시간에 몰래 회사 공중목욕탕에서 매일 기타를 튕기자 구내매점 주인이 고자질하는 바람에 회사에서 쫓겨났다. 이후 음악적 방향도 없이 그저 노래가 부르고 싶은 마음에 카페들을 방랑하며 노래 아르바이트를 했다.

결국 가수가 되려는 청운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을 했다. DJ 이종환이 운영하는 명동 쉘브르의 노래경연대회에 참가했지만 떨어졌다.

이후 무명 통기타 가수로 소일하다 빚을 내 이화여대 정문 앞에 ‘쉼표’라는 카페를 열었다. 영화사 ‘신씨네’의 신철과 배우 명계남 등 신촌 쪽에서 놀던 특이한 연예인들이 당시 내 카페를 아지트로 삼고 드나들었다.

카페를 작은 공연장으로 삼아 마음껏 노래하며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며 이성원은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당시 김민기, 한대수, 송창식, 양희은 등이 부른 노래 전곡을 ‘파 들어가며’ 연습했다.

하지만 양희은이 불렀던 김민기 곡 <밤뱃노래>속의 전통가락이나 특히 <진주난봉가>의 구수한 우리 가락이 가슴을 파며 스며 들어왔다. ‘내가 무엇을 노래해야 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우리가락을 노래해야 한다는 답을 얻었던 시기였다’고 이성원은 회고한다.

1985년 어느 날 봉은산에 별을 보러 올라갔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 ‘밤하늘을 바라보는데 신기하게 움직이던 별이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정신을 잃고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코밑의 상처는 그때 입었고 한동안 거동조차 할 수 없었다’고 이성원은 말한다. 기이한 경험은 1집 수록곡 <선인장>의 악상이 갑자기 떠오르며 창작의 물꼬를 터트렸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2002/06/21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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