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광진구 자양동 낙천정

서울 광진구 자양동 일대는 뚝섬의 평원이어서 조선조 태조 때부터 마장동, 장한벌(장안동), 면목동과 함께 군용 말을 방목 또는 사육하던 자리.

특히 암말을 길렀던 자양동은 ‘자색빛깔의 말’이라는 뜻으로 자마장(雌馬場 또는 紫馬場)이라고 불렀다. 자마장이라는 땅이름이 1949년 8월 15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자양동(紫陽洞)으로 불린 것이 오늘의 땅이름이다.

자양동 동남쪽 오늘날 현대아파트 부근에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높이 42.8m의 언덕이 있었다. 산의 모양새가 시루를 엎어 놓은 높은 언덕과 같다 하여 ‘대산(臺山)’이라 부르기도 하고, 벌판에 산이 있어 ‘벌뫼-발뫼’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발(벌)뫼를 한자로 옮긴 것이 발산(鉢山)이다. 비록 높이는 얼마 안되지만 발산(대산) 아래로 푸른 한강이 감돌아 흐르고, 강 가운데는 하중도(河中島)라는 섬이 떠 있었다.(지금은 개발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게다가 강 건너 남한산(南漢山)이 병풍을 두른 듯 펼쳐있고, 남쪽에 청계산(淸溪山), 관악(冠岳), 서쪽으로 남산, 매봉, 북쪽에 도봉(道峯), 삼각산(三角山), 수락산(水落山), 아차산(娥嵯山)의 기이한 봉우리가 한 눈에 들어와 경치가 천하의 제일경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가까이는 잠실벌의 백사장이 마치 비단을 깔아 놓은 것 같은데다가 푸른 강심 위로 계절 따라 백로, 갈매기, 기러기 등 온갖 철새들이 무리 지어 노닐었으니 이런 곳에 정자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조선조 3대 임금 태종(太宗)은 1418년에 왕위를 그의 아들 세종(世宗)에게 물려주고 같은 해 9월, 이 곳에 이궁(離宮)을 짓기 시작하여 그 다음 해인 세종 원년(1419) 2월에 준공했다. 당시 좌의정인 박은에게 건물 이름을 짓도록 하니, 주역계사(周易鷄捨)의 ‘낙천지명고불우(樂天知命故不憂)’의 뜻을 따서 낙천정(樂天亭)이라고 불렀다.

당시 문인 변계량이 낙천정기를 짓고 한성부윤 권흥이 글을 쓰고 판각하여 정자에 달았다고 한다. 태종은 수시로 이곳에 머물며 더러는 풍양궁(豊陽宮 :남양주시 진접면 내각리)과 연희궁(延禧宮 : 무악 아래 연희동)에 번갈아 가며 거동, 만년을 즐겼으나 특히 낙천정에 많이 머물며 자연과 벗했다고 한다.

이 낙천정에서 세종은 상왕인 태종을 자주 찾아 뵙고 왜구(倭寇)를 치기 위한 작전회의를 거듭하며 군함 삼판선(三板船)을 짓고, 1419년 6월 체찰사(體察使) 이종무(李從茂), 중군원수(中軍元帥) 유정현(柳廷顯), 좌군원수(左軍元帥) 최윤덕(崔潤德), 우군원수(右軍元帥) 유습(柳濕) 등 삼도 수군으로 하여금 대마도 정벌에 나섰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 낙천정에서 상왕인 태종과 세종, 그리고 문무잭관들의 영접을 받으며 출발한 삼도 수군은 황해 연안을 따라 남해의 다도해를 빠져나가 대마도를 쑥밭으로 만들고 무사히 돌아오니, 세종은 상왕인 태종과 함께 크게 기뻐하며 환영연을 베풀고 상을 내린 역사의 장이 바로 이 낙천정이다.

세종 4년(1422)에 상왕인 태종이 승하한 이후로는 이곳을 찾는 이 없이 건물은 점점 퇴락, 사라졌던 것을 1987년 역사의 고증을 거쳐 1991년 오늘의 모습으로 복원된 것이다. 저녁 노을이 한강 위로 물들면서 온통 자색(紫色)으로 변하건만 세월은 가고 역사는 말이 없다.

이홍환 현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입력시간 2002/06/28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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