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巨匠] 국악인생 40년 김영재

그의 인생에서 국악을 빼면 뭐가 남을까

“어머니라는 말 하나만 갖고도 이렇게 다양한 소리가 나올 수 있어요.” 평소 단아한 선비 같기만 하던 김영재(55ㆍ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전임 교수)는 이야기에 신이 오르자 변사로 돌변한다.

‘어머니’라는 말을 길게 잡아 늘린다 싶더니 꺾어 들어가던 그는 이번에는 서태지도 울고 갈 래퍼가 된다. 어머니란 말 하나로 경상도, 서도, 전라도에서 심지어는 힙합까지 넘나드는 그다.


식지않는 실험정신 “내 삶은 5분대기조”

그를 만나 국악은 우리 시대를 호흡하는 예술로 살아난다. 그는 거듭나기를 아직도 잊지 않은 별난 원로다. 국악을 중심 축으로 양의 동서를 가리지 않고 벌여 온 다양한 실험들이 휘돌지 않는 것은 중요무형문화재 16호(거문고산조) 준인간 문화재라는 듬직한 기둥 덕택이다.

한국인이라면 적어도 한 번은 그의 음악을 듣지 않을 수 없다. 가까이는 상암동 월드컵 프라자에서 열린 2002년 한일 월드컵 전야제에서 펼쳐졌던 군무 ‘설레임’을 받쳐 주었던 신명의 음악이 바로 그의 것이다.

1986년 강강술래와 바라춤을 응용해 만든 1986년 아시안 게임의 서막곡도 그의 작품이었다. 대형 공식 무대뿐만 아니다.

한국 관광길 외국인을 위한 민속 음악 무대로 쉐라톤 워커힐 가야금 홀에서 펼쳐지고 있는 50분짜리 연주곡 역시 그의 작품이다.

피리 대금 해금 가야금 거문고 아쟁 양금 모듬북 장고 꽹과리 바라 공 등 국악기 관현악단에 신디사이저 드럼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 등 양악기 실내악단이 함께 하는 곡에 외국인들은 무장 해제된다.

녹음 스튜디오의 국악 전문 반주자로 활약중인 1급의 연주자들로만 모인 별난 합주단이다. 그의 음악에는 중중모리 자진모리 등 다양한 전통 장단이 곡에 맥박을 준다. 여기에 우조 평조 계면조 경기민요조 강원도조 농요조 불교음악조 창작조(신조) 가요조 등 전통 음악에 기반한 다양한 음계들이 가락을 엮어 간다.

대학에서 1~4학년 전공 수업으로 해금과 거문고를 가르치고 학생들의 공연도 지도한다. 또 과외 활동으로 찾아 가는 문화 행사, 국가 행사 등이 있을 때 관현악 합주도 지도한다. 그에게는 국악과 양악의 점이지대에서 젊은 음악인들의 정신적 대부로 듬직하게 균형점을 지켜 온 세월이 깔려 있다.

“아무리 늦어도 9시까지는 귀가해서 해금과 거문고 병창 연습에 2시간은 바쳐요.” 요즘 그의 얼굴은 생기에 차 있다. 이번에는 ‘국악 인생 40주년 기념 연주회’다.

자신의 예술을 정리하는 자리이기도, 제자들이 꾸미는 헌정 공연장이기도 한 보기 드문 자리다. 늦어도 오후 9시면 귀가해 매일 적어도 1시간 이상은 연주자로서의 긴장을 유지해 온 세월을 압축한다.

그는 “행여 손가락을 다칠까 봐 운동은 전혀 하지 않는다”며 “내 삶은 5분 대기조”라고 말한다. 무대와 교육 현장을 쳇바퀴 돌 듯 살아 온 인생을 빗댄 말이다. “매일매일 연습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양심에 꺼려져요.” 해금, 거문고, 병창 연습을 철든 이래 하루도 거른 적 없다.

잡기를 전혀 하지 못 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는 아직도 매일 적어도 1시간 해금과 거문고를 연습한다.

현을 너무 눌러 손가락이 아프면 소리나 장고 연습으로 달래는 식이다. 그의 인생은 국악을 뺀다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예사롭지 않은 이번 공연을 받아들이는 마음도 평상심에 가깝다. “제대로 쉬어 보지도 못 하고 해외 공연에 몰두하던 시간들을 뒤늦게 정리해보자는 거죠.”

그의 일상은 41년 전 국악예술학교(현 서울국악예술중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매일 오전 6시면 일어나 거문고와 해금을 30여분 타고 난 뒤에야 아침 식사를 한다.

강의 후 늦어도 9시면 귀가, 줄을 한 번 더 다스린다. 1998년 한국종합예술원 교수로 재직해 온 이래 변함 없는 일상이다. 1961년 국악예술학교(현 서울국악예술중ㆍ고)에 입학, 지영희류의 해금 산조로부터 출발한 그의 국악기 연주는 중1 때의 거문고, 중2 때의 가야금, 고1 때의 양금 수업 등으로 지평을 넓혀갔다.

여기에다 악가무 일체의 전통적 교육 원칙에 따라 중1부터는 판소리 민요 가곡 농악 등 소리와 연주는 물론 상모돌리기와 승무 등 무용까지 이수한 국악의 전인(全人)이다.

명창 박초월, 경기민요 무형문화재 이창배, 인간문화재 홍원기,꽹과리의 달인 전사중, 춘앵무의 김천흥, 승무의 한영숙 등 전설적 명인들이 모두 그의 스승이었다. 아직도 꼿꼿한 그의 매무새에는 10대부터 새벽별을 보며 몸매무새를 다졌던 시간들이 배어 있다.

1968년 창설된 육군본부 국악대(20명)의 단원이었던 그는 늘 아쉬웠던 이론 공부를 위해 경희대 음대 작곡과 편입도 마다 않았다. 고교 은사였던 ‘가고파’의 작곡자 김동진 선생이 그를 잊지 않고 불렀던 것이다.

1972년 한국민속예술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던 뮌헨(올림픽)과 일본 순회 연주회는 이후 계속된 세계와 만남의 신호였다.

국립무용단 반주자로 그는 자신의 악기 5개를 들고 다니며 남미 캐나다 중동 아프리카 등지로 정신 없이 연주를 다녔다. “힘겨웠지만 내 삶 중 가장 빛났던 시간이죠.” 박범훈(작곡) 이생강(대금) 이영희(가야금) 한상묵(장고) 등 지금은 국악계의 어른으로 활동중인 사람들이 당시 그 콘서트의 공로를 인정받아 그와 함께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상했다.


현장서 뛰는 것이 힘의 원천

1991년작 ‘적념(寂念)’은 이를 테면 최대의 히트곡이다. 해금으로 서원대 이병욱 교수(기타)와 듀엣을 이뤄 쓸쓸한 마음을 그려낸 이 곡은 피아노 등 반주 악기를 바꿔가며 변주, 지금도 전통 찻집이나 국악 FM 방송 등에서 시류에 관계없이 선호되는 현대의 고전이다. 그는 이 시대 대중이 국악에서 어떤 것을 바라는 지 잘 알고, 기꺼이 그 부름에 따를 줄 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무조건 추수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자기만의 황금률이 있다.“내 작품에서 우리 음악 대 양악의 비율은 7 대 3이죠.”그 황금률에 따라 작곡된 것이 그의 히트 국악들이다.

그는 한 가지 경고를 잊지 않는다. “젊은 국악인들이 종종 하듯 국악기를 완전히 서양식으로 평균률화하는 것은 절대 반대에요.”

우리 말의 토리(말맛)를 영어로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음악 역시 고유의 ‘시김새(맛)’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데에는 일말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일부 원로급 국악인들이 우리 악기로 재즈를 연주하는 등의 시도가 끊이지 않는 것은 국가에서 제도적으로 국악을 너무 몰라주니 안타까운 마음에서 하는 것이라고 그는 경험적으로 믿고 있다. “제대로 잘 익히면 가만 있어도 남들이 사간다. 너희들은 채 익기도 전에 사달라고 떼 쓰려느냐?” 정통만을 강조하는 자신에게 볼멘소리를 하는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말이다.

국악 원로답게 전수 학원 하나 차려 자기류의 음악을 답습할 법 하건만 그는 고여 있을 줄 모른다. 그 쇄신의 힘은 살아 숨쉬는 현장과 늘 함께 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학교 강의는 물론, 무대 활동이 바로 힘의 원천이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국악 상설 무대 ‘우리 소리’가 그것이다. 10년 전 2억 5,000만원을 들여 건립한 이 3층 건물의 지하 1층 전부다.

매달 마지막 목요일이면 기악이나 판소리 정기 무대가 열려 홍익대 이대 연세대 서강대 등 인근 대학가 학생이나 국악 팬들이 몰려든다. 천장에 전통 문짝을 달아 둔 12평짜리 마루는 깔끔한 정자 하나를 도심에 옮겨 놓은 듯 아취를 발한다.

특히 매년 3월초 각종 장르를 망라해 펼치는 개관 기념 공연 때는 신발을 따로 벗어두고 곧추 서서 구경해야 할 만큼 성황을 이룬다. 안숙선 이춘희 이영희 등 인간 문화재급이 등장하는 ‘명창 판소리’ 공연도 이곳의 커다란 자랑이다.


우리선율 서양 5선보로 옮기는 작업

이번 무대 후 한숨 돌리고 나면 그 동안 미뤄왔던 저술 작업에 충실해 볼 계획이다. 그는 1977년 ‘현금(玄琴)곡 전집’을 필두로 3월 ‘김영재 거문고 창작곡집’ 등 모두 6권의 악보집은 물론 ‘거문고 줄풍류 연구’등 굵직한 논문 6편을 남긴 저자이기도 하다.

앞으로는 해금과 거문고 심층 연구와 함께 기존의 기보법으로는 도저히 맛을 낼 수 없는 우리 선율을 서양 5선보로 옮기는 기보법도 연구, 후학의 공부에 채찍이 됐으면 한다.

“소리의 흔들림, 꺾임 등 국악 특유의 음 현상까지 나타낼 수 있는 기보법은 언제나 숙제였어요. 매일 할 게 있으니 남보다 즐겁죠.” 망육순이지만 할 일이 있어 그는 힘차고 꼿꼿하다. 그의 삶은 즉흥성에 충실한 우리 전통 음악을 닮아 늘 싱싱하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2002/06/28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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