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칼럼] 작은 공간 큰 권위

1987년부터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연준) 이사회 의장직을 맡아 미국의 통화정책을 수행해온 그린스펀의 명성이나 영향력에 대해서는 워낙 잘 알려져 있어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듯 하다.

90년 대 후반부에 미국경제는 4%대의 빠른 성장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이 3% 이하에 머무는 양호한 거시경제의 모습을 유지했다. 미국경제의 과거 30여 년간을 통해 전대미문의 성과였는데 여기에는 그의 공이 크게 작용했다는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국제금융시장에서는 그의 리더십이 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전 세계적 금융위기로 확산되는 것을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일부에서는 그의 능력이 지나치게 고평가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필자가 11년 동안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준에서 연구위원으로 재직할 동안 워싱턴에 소재한 연준 이사회에서 1년간 근무하게 되어 그린스펀 의장을 가까이 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 국제부에서 영국경제를 담당했었는데 영국에서 주요 방문객이 있을 때 영국경제 현황에 대한 간단한 보고서 작성과 필요시 면담에 배석하는 것이 업무의 일부였기 때문에 그의 사무실을 몇 번 보았다. 연준 의장의 사무실은 한마디로 무척 단촐하다.

이사회 본관건물이 작고 건물이어서 방들이 작다. 그의 사무실은 실질적으로 그보다 격이 낮은 연준 은행의 총재 사무실보다 작고 단촐했다. 현대적인 연준 은행 건물들에 비해 오래된 이사회 본부건물은 오래되어 협소하기 때문이다.

한번은 영국에서 주요인사가 방문하여 상사와 동반 배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의장 사무실에 접견용 가구가 따로 없어서 참석자수가 대여섯명 정도인데도 의자가 모자라 옆 비서실에서 의자를 가져와야 했다.

크기로 보았을 때 아마 한국의 웬만한 조직의 장들이 쓰는 사무실이 그린스펀 의장의 사무실 보다 큰 듯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미국 중앙은행의 최고 책임자가 조촐한 사무실을 써야 될 정도로 크지 않은 이사회 본관 건물의 대부분 공간을 정책에 대한 연구와 경제분석을 담당하는 부서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그 작은 건물에 한국으로 치면 연구위원이라 할 수 있는 경제분석 실무자들에게 작으나마 각자의 방으로 된 사무실이 주어진다. 이 부서들의 실무자들은 관련분야 박사학위를 취득한 다음 다단계 선발과정을 거쳐 선발된 고급인력이다.

연준은 한은과 비슷하게 통화정책을 전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은행에 대한 감독책임도 수행하고 있어 관장해야 될 업무가 상당히 다양하다. 당연히 이사회에도 성격이 다른 부서들이 있고 별관 사무실 공간도 크다.

그럼에도 의장과 이사들 가장 가까이 있는 파트는 경제분석과 정책연구를 하는 부서들이며 그 부서의 장들이 의장을 밀착 보좌한다. 이런 모습은 상징적으로 그린스펀 의장의 명성이나 권위가 개인적인 판단능력에도 근거하겠지만 그가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보좌하는 전문가들의 기여가 크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대개의 사무실 구조를 보면 조직의 장은 상당히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것에 비해 조직원들의 공간은 협소하다. 이런 현상은 넓은 사무실과 같은 혜택을 향유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라는 우리 나름의 인센티브 시스템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니 그 큰 사무실을 혼자 오래 차지하고 있게 되면 열악한 상황에서 기다리고 있는 대기자들의 희망을 앗아가는 부덕한 처신이 된다. 어떤 곳에서는 후진이 승진하면 선배들이 우르르 퇴진하는 전통도 있다.

능력 차이가 그 정도 크겠느냐는 생각도 깔려있는 것 같다. 한 사람이 한 자리를 오래 차지하지 않는 행태는 일종의 나이 차이를 기준으로 한 나눠먹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인사가 잦다. 그린스펀 의장은 1987년 이후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연준 이사회에서 필자의 상사는 그 부서의 장을 20년 넘게 맡아왔다. 물론 그 사람은 젊은 나이에 발탁됐다. 은퇴할 때까지 실무자로 일하다 나가는 연구자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보통 전문성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거나 같은 일을 오래 해야 쌓인다.

한국의 일부 기관들은 인사적체가 문제이기 때문에 외부수혈은 생각도 못해보고 같은 인력풀 중에서 2, 3년도 안돼 끊임없이 물갈이를 하곤 하는데 이는 전문가 육성을 저해하는 인사행태다.

한국, 특히 전문적인 일을 하는 직장에서 불필요하게 큰 사무실이 사라지는 때가 오면 좋겠다.

허 찬 국 한국경제연구원 거시경제센터 소장

입력시간 2002/06/28 20:49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