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업 구속… 검찰, 유탄 맞나

새한그룹 수사 무마건 돈 수수 사실로…'검찰 게이트' 비화 가능성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8강전이 있기 바로 전날인 6월 21일 김대중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씨는 검찰에 ‘조용히’ 구속됐다.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월드컵에 쏠려 있는 터여서 홍업씨의 구속은 그리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홍업씨의 구속영장에는 기업체들에 대한 각종 청탁 명목으로 22억8,000만원의 대가성이 있는 금품을 받았다고 적혀있다. 홍업씨의 구속영장이 발부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홍업씨의 영장을 발부한 서울지법 영장전담 황한식 판사는 “범죄사실에 대한 소명이 충분하다. 검찰이 (홍업씨 구속을 위해) 많이 준비한 것 같다”고 말했다. 홍업씨는 영장이 집행될 때 “억울하지 않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굳은 표정으로 “죄송하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호송차에 올라 서울구치소로 향했다.

특검에서 홍업씨 문제가 불거진 이후 80여 일간 집요하게 계속된 검찰의 ‘홍업씨 구속작전’이 성공리에 1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월드컵 열풍에 언론도 ‘시들’

2달여간 언론을 도배질 하다시피 하며 구속됐던 홍걸씨에 비하면 홍업씨의 사법처리는 마치 정교한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된 듯이 보일 정도로 차분했다. 검찰이 홍업씨의 혐의를 잡기 위해 ‘장기전’을 펼쳐 언론도 진이 빠진 상태였다.

수사 초기에는 동생인 홍걸씨의 사건이 워낙 거세게 몰아쳤고 홍걸씨의 측근인 최규선씨가 거칠 것 없는 언행으로 수사팀과 언론의 발을 붙잡아 놓았지만 사법처리 국면에선 한국 축구팀이 선전한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러나 한 꺼풀 뒤집어 보면 검찰 역시 수혜자였다. 검찰은 수사기간 내내 김성환, 유진걸이거성 등 홍업씨의 측근 3인방이 입을 다무는 바람에 고전했다. 검찰로선 월드컵이후 20일여일간 국민의 시선이 축구에 쏠려 있는 사이 홍업씨를 향한 비장의 카드를 준비할 시간을 벌은 셈이다.

검찰 주변에선 수사가 장기화되자 “홍업씨가 빨리 구속되는 것이 본인을 위해 좋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당사자들의 조사에서 수사가 벽에 부딪힐 경우 검찰은 사활을 걸고 ‘홍업씨의 모든 것’을 뒤질 것이 분명해 더 큰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업씨의 ‘저항’은 계속됐고, 결국 검찰은 계좌추적 등을 통해 홍업씨의 추가 혐의를 속속 밝혀냈다.


수사팀 향한 무언의 압력 “힘들었다”

홍업씨의 사법처리를 둘러쌓고 청와대의 태도는 상당히 주목을 끌었다. 청와대는 수사초기부터 공개적으로는 “검찰의 처리에 맡길 것”이라는 원론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실제 홍업씨의 처리 문제를 놓고 공개적으로 압력을 행사한 의혹이 표면화된 것은 없다. 그러나 검찰 주변에서 감지되는 느낌은 청와대의 언명과는 확연히 다르다.

청와대는 특히 언론에 홍업씨와 측근들의 혐의가 속속 터져 나오는 데 대해 상당히 불쾌한 반응을 검찰에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이 언론플레이를 하며 홍업씨 구속쪽으로 바람을 잡아간다’는 의심을 했던 것이다. 수사팀의 한 관계자는 “지금은 말 못할 사정들이 많다”면서 “그러나 여기저기서 수사팀에 쏟아지는 무언의 압력은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중수부팀에게 청와대가 직접적인 압력을 넣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시각도 많다. 이재신 민정수석이 이명재 검찰 총장에게 직접적인 압력을 넣을 처지도 아닐 데다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 수사 실무진은 중수부장을 제외하고는 박만 기획관과 김진태 중수2과장이 TK(대구ㆍ경북),PK(부산ㆍ경남) 출신이어서 여권과는 맥이 닿지 않는 인물들이다.

이 총장이 수사팀의 판을 짤 때 호남 출신 중수부장 밑에 ‘장수’들을 비호남 출신들로 채운 것도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견제와 균형’을 노린 것이라는 말들이 많다.


청와대ㆍ검찰 중간에 낀 법무장관

이런 상황 탓에 여권에서 검찰에 대한 불만을 전달하는 창구로 법무부를 활용했다는 말들이 무성하다. 특히 이 과정에서 송정호 법무부 장관의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법무부장관은 검찰 수사에 직접 관여할 수는 없지만 법에 규정된 ‘일반명령권’을 이용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이다. 검찰 내에서 송 장관에 대한 평은 엇갈리나 “예상외로 송장관이 바람막이를 잘 해주어서 홍업씨 구속까지 몰고 갈 수 있었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전북 출신으로 친 여권인사로 분류되는 송 장관은 청와대의 불만을 비교적 잘 무마하면서 청와대의 의사를 검찰에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통로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지금 생각해 보면 송 장관이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이 검찰로서는 최대의 행운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송 장관은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에 대해 심적인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송 장관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각료회의를 하면 매번 대통령 얼굴을 마주 보아야 하는데 그것처럼 고역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청와대에선 막판까지도 “정말 홍업씨를 구속해야 하느냐”고 매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이 때문에 홍업씨의 사법처리가 늦어졌다는 설도 나온다.

이와 관련, 지방선거에 출마한 각료들의 공백을 메우고 국정쇄신 차원에서 이뤄질 것으로 예상되는 개각을 앞두고 송 장관이 교체될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유진걸 구속으로 여권 반발 맞받아쳐

검찰은 홍업씨 구속에 앞서 대학동기인 유진걸씨에 대해 6월 11일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6ㆍ13 지방선거 2일전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2일 유씨의 영장심사 과정에서 “홍업씨가 성원측으로부터 3억원을 받았다는 진술을 검찰이 확보했다”는 사실이 흘러나왔고 이는 선거 당일인 13일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말만 무성했던 홍업씨의 비리혐의가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월드컵 열풍을 타고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홍업씨 수사가 선거 직전에 화약고로 터진 양상이었다. 유권자들에게는 잊혀졌던 기억을 되살리는 계기였고, 선거 결과에 사활을 걸었던 여권에게는 치명타였다.

검찰 내부에서도 유진걸씨의 구속 시점을 놓고 격론이 벌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수사팀은 “유씨를 계속 방치할 경우 막판에 접어든 홍업씨 수사에 지장을 받는다”며 “정치 논리를 따지지 말고 정도(正道)로 가자”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언론에선 홍업씨에 대한 기사가 다시 불이 붙기 시작한 시점이었고 여권 핵심부에선 “검찰이 언론플레이를 한다”고 분통을 터뜨리는 상황이었다.

유진걸씨 구속이 검찰 주장대로 “수사 진행상황에 따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면에는 홍업씨의 소환을 앞두고 여권의 반발을 제압하기 위한 선제공격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 검찰 주변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검찰 내부 격량에 휩싸일 수도

홍업씨는 구속됐지만 검찰의 처지는 그리 쉬운 상황이 아니다. 검찰은 홍업씨가 업체들에게서 돈을 받은 것은 밝혀냈지만 실제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는지에 대해선 아직 답을 내놓지 않았다. 홍업씨 수사가 ‘국세청게이트’ ‘검찰게이트’로 비화되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했다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특히 홍업씨가 새한그룹 이재관 부회장의 검찰 수사 무마건 등과 관련해 돈을 받은 사실이 들어 난 만큼 검찰 내부가 다시 격랑에 휩싸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검찰 고위직이 줄줄이 옷을 벗은 ‘이용호게이트’의 제2탄으로 비화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검찰청 주변을 감싸고 있다.

이태희 기자

입력시간 2002/06/28 21:07


이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