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문화읽기] <마리 이야기>가 깨준 환상

이성강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마리 이야기]가 제 26회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장편경쟁부문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최근 칸 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이 감독상을 수상한 일이나 한국 축구국가대표팀의 놀라운 선전에 비견될 만큼 기쁘고 반가운 소식이다.

시장 규모가 적고 관객층도 두텁지 못한 장편 애니메이션의 국내 현실을 생각한다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열악한 상황을 독특한 상상력과 부단한 노력으로 극복해낸 미학적인 승리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일반적으로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게다가 애니메이션은 과장된 섹슈얼리티로 포장한 성인용, 동화적인 세계를 그려내는 아동용, 현대사회의 비극적인 초상을 미래사회로 옮겨 놓은 SF물이 커다란 흐름을 이룬다.

하지만 [마리 이야기]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 깃들어 환상, 그것도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환상이 아니라 누구나 가지고 있는 환상을 그려내고 있어서 그 자체만으로도 이채롭다.

올해 1월 [마리 이야기]를 보고 나서 우리도 작가주의 애니메이션 감독을 가지게 될 것 같다는 기대감을 가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마리 이야기]는 일상의 작은 틈새에서 시작된다. 주인공은 사막처럼 건조한 직장생황을 하고 있는 남우. 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 고향 친구 준호의 연락을 받고 오랜만에 회포를 푼다. 남우는 그 자리에서 준호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남우의 고향은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바닷가의 작은 마을. 횟집을 운영하는 할머니와 홀어머니가 그의 가족이다. 조용하고 어두운 내면을 가진 남우의 친구로는 밝고 쾌활한 성격의 준호와 떠돌이 고양이 요가 있다.

유일한 친구인 준호가 서울로 이사간 이후로 남우의 외로움은 깊어만 가고, 그러던 어느 날 사라진 고양이 요를 찾으러 들어간 등대에서 섬광과 함께 환상의 세계에 빠진다.

숲 속을 나는 물고기 새와 커다란 삽살개가 있는 그곳에서 남우는 아름다운 소녀 마리를 만난다.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왔지만 마리와의 만남을 잊지 못한다.

좋은 애니메이션은 탄탄한 이야기 구조와 함께 독특한 그림과 화면구성을 선보이게 마련이다. [마리 이야기]의 그림과 화면구성은 대단히 세련되고 독특하다. 물론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를 연상시키는 대목이 있다는 의견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큰 개를 제외한다면 특별한 유사점은 발견되지 않는다. 물론 하얗고 큰 개는 누가 그리더라도 [이웃집 토토로]를 연상할 여지를 남길 수밖에 없을 듯하다. 한 눈에 들어오는 [마리 이야기]의 특징은 그림의 윤곽선이 흐릿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설정은 마치 일상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의 구도를 시각적인 차원에서 반영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또한 3차원적인 장면들을 2차원적인 장면으로 수정함으로써 원근법(투시도법)의 적용을 미학적인 차원에서 견제하고 있는 점도 눈 여겨 봐두어야 할 대목이다.

특히 놀라운 점은 색채이다.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마리 이야기]는 강렬한 원색을 배제하고 은은한 파스텔 톤을 사용하고 있다. 영화의 전반적인 색조인 파스텔 톤이 가져오는 미학적 효과는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환상이란 일상의 지루함을 한꺼번에 불지를 정도로 강렬한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이를 두고 환상에 대한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마리 이야기]는 환상에 대한 우리의 관습적인 생각을 용인하지 않는다.

환상이란, 화선지가 물기를 머금듯이, 일상의 배후로부터 배어나는 것이라는 느낌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이성강 감독의 작품을 통해서 회색이 그토록 아름답고 몽환적인 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괴테의 파우스트 박사에서 제시되었던 것처럼, 회색이란 권태와 관념의 색이 아니었던가.

[마리 이야기]를 통해서 회색은 이제 일상과 환상을 매개하는 색으로서 새로운 상징성을 부여받게 되었다는 생각을 가져 보았다.

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마리 이야기]의 재개봉 소식을 들었다. 월드컵의 열기도 즐기는 가운데, [마리 이야기]가 보여주는 순수 서정의 세계에도 따뜻한 시선이 머물렀으면 한다.

환상적인 분위기에 깊이를 부여하고 있는 기타리스트 이병우의 영화음악도 놓치기 아까운 즐거움이다.

김동식 문학평론가

입력시간 2002/06/30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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